[바른말 광] '안한다'고 하면 안 된다
보기에는 사소한 듯한 띄어쓰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띄어 쓰느냐 붙여 쓰느냐에 따라 뜻이 천양지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설 늘어놓을 필요 없이 바로 보기를 보자.
'부푼 마음으로 제주도에 도착했지만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탓에 형님과 나는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떨면서 첫날밤을 보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이랬다면, 집안 꼴은 엉망이 된다. 형제가 노숙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게 아니다. '첫날밤'이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밤'이기 때문이다. 한자말로는 '초야(初夜)'다. 그러니 부모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않으려면 '첫날 밤'으로 써야 한다. 비록 '첫날'에도 '시집가거나 장가드는 날'이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주로 '어떤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로 쓰기 때문이다. 띄어쓰기 하나가 이렇게나 무섭다.
'천 년 전인 고려 시대에, 제13대 왕 선종은 승과(僧科)를 설치하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도서를 출판하는 따위의 불교 발전에 힘썼다.'
사실과 다른 이 엉터리 문장은 띄어쓰기 하나로 구제될 수 있다. 먼저, 이 글이 왜 엉터리냐 하면, 선종은 1049년에 태어나 1094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재위 기간도 1083~1094년이다. 즉, 왕이 된 게 겨우(?) 929년 전이니 '천 년 전'이라는 시대배경 설명이 잘못된 것. 하지만 띄어쓰기 하나만 손보면 이 문장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바로 '천 년'을 '천년'으로 붙여 쓰면 되는 것이다. '천 년'은 '1천 년'이지만 '천년'은 '오랜 세월'을 뜻하기 때문이다.
<權국토 "2015년까지 수도권 신도시 지정 안한다">
종편을 보유한 어느 신문의 제목인데, '안한다'가 잘못이다. '안하다'라는 우리말이 없기 때문에 붙여 쓰면 안 된다. 반드시 '안 하다'로 띄어 써야 한다는 말이다.
'안되다/안 되다'도 띄어쓰기가 많이 헷갈리는 말들이다. 하지만 어려울 거 없다. '안되다'의 반의어가 '잘되다'이고, '안 되다'의 반의어가 '되다'라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시간이 없어서 암기가 안된다/그건 먹으면 안 된다'로 쓰면 된다.
이래도 띄어쓰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독자께는, 좀 무섭지만, 이런 보기를 보여 드린다.
'지난 2일 시체 육회 관계자는 사격팀을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시체? 육회! 이진원 기자http://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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