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26

슈베르트 피아노 소품 셋3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어떤 안부 : 나호열​

어떤 안부 / 나호열​소식은 멀리서 들어야 향기가 난다세상 떠난 지 오래인 어떤 이의 부고가산다화 필 무렵 눈에 짚이고야반도주한 모 씨가 부자가 되었다는 누더기 같은 이야기를흘러가는 강물이 귀를 씻어주듯이그리운 소식은 길이 멀어야 가슴에 메인다​-『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208쪽)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피아노 소품 셋3 Klavierstücke D. 946I. Allegro​ II. Allegretto​ III. Allegro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피아노Recorded at the Berliner Philharmonie (Berlin, Germany) on June 5, 2013 https://www..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 의외의 대답 : 천양희

의외의 대답 / 천양희 ​내가 세상에 와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강변에 나가 앉아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내가 세상에 와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강가에 서서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내가 세상에 와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무릎 꿇고 앉아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내가 세상에 와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단 한 사람이라도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나를 잃는 것 -(천양희, 창비, 202..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아카시아 : 나희덕

아카시아 / 나희덕저무는 봄날 하얀 비 맞으며나는 그 길 위로 걸어왔습니다숨막힐 듯 단내 나던 꽃송이산산이 부서져 뼛가루처럼어디론가 불려가는 날,마른 꽃잎을 한 줌 움켜보니금방이라도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당신은 얼마나 한숨을 잘 쉬시던지모두 여기 날아와 쌓인 듯합니다한숨 한 줌이렇게 되려고 달려온 건 아니었는데머리 위의 꽃비는 하염없습니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작과비평사, 1994, 35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Febr..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色, 아름다운 세상 : 박두규​

色, 아름다운 세상 / 박두규​툇마루에 앉아 강 건너 앞산바라기를 하다가 세상의 온갖 색에 젖어 마음이 촉촉해진 어느 날, 한순간 헛소리나 하는 것처럼 우연히 ‘아름다운 세상’하고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딸꾹질을 하듯 눈앞의 아름다운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내 안으로 훅, 들어왔다. 감당하기 힘든 고마움으로 한껏 순해진 마음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마음의 외출로 텅 빈 내 안은 모처럼 아름다운 지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 『은목서 피고 지는 조울躁鬱의 시간 속에서』(박두규, b, 2022, 61쪽)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

바흐 바이올린소나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 프랑크 페터 짐머만, 엔리코 파체 - 봄비 : 김소월​

봄비 / 김소월​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 앉아 우노라.​ *어룰 : ‘얼굴’의 방언(평안북도)  - 『하루 한 편 김소월을 새기다』(김소월, 영진닷컴, 202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바이올린과 쳄발로 소나타Sonata for violin and cembalo(BWV 1014-BWV 1019) 바이올린소나타 1번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B minor BWV 1014프랑크 페터 짐머만Frank Peter Zimmermann 바이올린..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민들레 : 나태주

민들레 / 나태주​우주의 한 모서리​스님들 비우고 떠나간 암자늙은 무당이 흘러, 흘러 들어와궁둥이 붙이고 사는 조그만 암자지네 발 달린 햇빛들모이는 마당가 장독대깨어진 사금파리 비집고민들레는 또 한번의 생애를서둘러 완성하고바람결에 울음을 멀리멀리까지 날려보내고 있었다​따스한 봄날의 하루.​​- 『슬픔에 손목 잡혀』(나태주, 시와시학사, 2000)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I. Allegro ma non troppoII. Larghetto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꽃의 이유 : 마종기

꽃의 이유/  마종기꽃이 피는 이유를전에는 몰랐다.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전에는 몰랐다.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잠에서 깨어나는물 젖은 바람 소리.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그 나라 하늘빛』(마종기, 문학과지성사, 200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하이든 피아노소나타 32번, 47번, 49번, 슈베르트 즉흥곡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박두규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박두규​ 툇마루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의심도 없이 그대를 쫓아온 세월은 아직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대의 환영幻影을 노래한 시詩들도 은어의 무리처럼 거침없이 따라 오른다. 이승의 시간이 다하기 전, 그대를 한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 생각만이 아직도 늙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강의 하류에 이르렀건만 지금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이 허튼 생각만이 남아 가여운 나를 위로한다. -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박두규, 모악, 2018, 15쪽)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피아노소나타 32번Sonate (Divertimento) Nr. 32 op. 53 Nr. 4 g-Moll Hob.XVI:44피아노소나타 47번Sonate (Divertiment..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겨울나무 : 복효근

겨울나무 / 복효근​​꽃눈은 꽃의 자세로 잎눈은 잎의 자세로 손을 모으고 칼바람 추위 속에 온전히 저를 들이밀고 서 있네 나무는, 잠들면 안 된다고눈감으면 죽는다고바람이 둘러주는 회초리를 맞으며 낮게 읊조리네 두타頭陀*의 수도승이었을까 얼음 맺힌 눈마다 별을 담고서 나무는높고 또 맑게더 서늘하게는 눈뜨고 있네 ​* 두타(頭陀) : 산야를 떠돌면서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음, 또는 그런 수행을 하는 중을 뜻한다.​​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달아실, 2017)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