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09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 알레나 바에바 - 곰소에서 : 이대흠

곰소에서 / 이대흠​ 나무를 덧대어 만든 커다란 소금창고는 기울어져 있었다 평생을 물에서 오신 소금을 모신 곳이었으니 여전히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이 들어와 있을 때보다 썰물 때 더 기울어져 있었다​내게 남은 것은 그대가 남기고 간 한줌 소금 같은 그리움이니!​베인 상처에 갯물이 들 때처럼 마음 안이 쓰리고그대 떠나고 나도 그대 쪽으로 기울어졌다​해가 질 것이고 바닷바람에 나는 낡아갈 것이다조금 더 기울어질 것이다​-(이대흠, 창비, 201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바이올린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878)I. Allegro moderatoII. Canzonetta: Andan..

슈베르트 즉흥곡 넷 D. 899, 피아노 소품 셋,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편지 : 신경림

편지 / 신경림-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새벽에 일어나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동태 두 마리 사 들고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거기서 나는 보았구나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살을 맞비비며 사는그 넉넉함을,세상을 밀고 가는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생각느니보다 삶은더 크고 넓은 것일까,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네가 보낸 편지를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떨어져나갈 때까지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걷고 또 걸었구나.​​-『달 넘세』(신경림, 창작과비평사, 1985, 1998)   Grigory Sokolov plays Schubert, Beethoven, Rameau, and Brahms 프란..

바흐 바이올린소나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 프랑크 페터 짐머만, 엔리코 파체 - 나마스카 : 박두규

나마스카 / 박두규 그대의 영혼에 안부를, 나마스카강 노을과 함께 산마루에 해가 저물고이승의 하루가 스러지는 시간이 되어서야겨우 그대를 떠올리게 됩니다세상 속 홀로 저무는 하루를 보며아직도 남아 있는 내 안의 외로움과 두려움으로하루의 끝에서 그대를 생각합니다나마스카, 아름다운 내 영혼 그대여종일토록 그대를 찾아 헤맨 고단한 육신도말없이 곁을 지켜준 모든 것들에도어둠 속 야윈 달빛에 기대어 안부를 전합니다나마스카, 깊은 밤 고요를 흐르는 은하여아직도 세상의 화려한 불빛을 좇아 흐르는 저에게별빛에 젖은 촉촉한 눈망울과숲속의 부드러운 바람결을 기억하게 하소서그것이 모두 그대가 보내는 안부임을 알게 하소서나마스카, 사랑인 줄 알게 하소서 -『은목서 피고 지는 조울躁鬱의 시간 속에서』(박두규, b, 2022,17..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숲길은 안다 : 허형만

숲길은 안다 / 허형만고요히 들여다 보는 시간들이나뭇잎처럼 매달린 숲길신갈나무 아래 도토리도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숲길 따라 걸어가는 발 아래서살아온 날 눈물겹다눈물겹다 바스락거리는 소리후르르 멧새 날아오르는 소리송송송 그물처럼 햇살 내려앉는 소리와곧 밀려올 일몰의 공기에 집중하며나의 묵주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숲길은내가 얼마나 평화를 바라는지 안다. -『바람칼』(허형만, 현대시학사, 2019)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llemandaⅡ. DoubleⅢ. CorrenteⅣ. Double. PrestoⅤ. SarabandeⅥ. DoubleⅦ. Tempo Di BoreaⅧ...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새해의 기도 : 이성선​​

새해의 기도 / 이성선​​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가장 맑은 눈동자로​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기도하는 나무가 되어​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높이 비상하며​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새해엔, 아아​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나는 그 하늘 아래​아름다운 글을 쓰며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나날이게 하소서​​​- 『이성선 시전집』(이성선, 시와시학사, 2005)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I. AllegroII. Scherzo : Assai viv..

베토벤 교향곡 9번 : 알렉산드르 루딘 - 세밑 : 신경림

세밑 / 신경림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삶의 뜻으로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 푸섶길 : 풀과 잡목이 우거진 길-(신경림, 창비, 1999)   시인의 시에서처럼저물녘 우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 사고들로 심란한 세밑이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평온한 시간 시간이 얹어지기를 소망합니다.​새해에는 아픈 이..

차이콥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교향곡 6번 ‘비장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 그해 겨울 : 곽효환

그해 겨울 / 곽효환​한 사람이 가고 내내 몸이 아팠다겨울은 그렇게 왔다가지 끝에서부터 몸통까지여윈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마른기침은 시든 몸 폐부 깊은 곳을 찔렀다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좀체 가시지 않는 통증,나는 미련을 놓지 않았고나는 내내 기다렸으나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모두들 잠든 새벽 네 시,혼자 남은 빈 병실 창밖으로띄엄띄엄 깊은 겨울밤을 가로지르는자동차 전조등을 보며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을 헤아렸다그 겨울은 혹한도 폭설도 없었지만오랫동안 물러설 줄 몰랐다어림할 수 없는 그 끝을견딜 수 없어, 더는 견딜 수 없어마음을 먼저 보냈으나봄도, 그도……그렇게 겨울은더 깊어지거나 기울었다- ​『슬픔의 뼈대』(곽효환, 문학과지성사, 2014)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발레리 폴리안스키 - 휴전 : 이시영

들꽃을 찾아오는 모든 분께 아기 예수의 축복을 전합니다.메리크리스마스!   휴전 / 이시영​    1914년 12월 25일 오전 10시경 꽁꽁 얼어붙은 유럽의 서부전선, 참호 밖으로 나온 영국 보병부대 소속 앨프리드 두건 차터 소위는 총을 놓고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독일군 병사 두 명을 맞아 악수를 하고 담배를 나눠 피웠다. 그리고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넸다.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단 30분간의 짧은 만남이었다. 그 후 전선에서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푸라기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잠시 동안 이 세계가 아주 따뜻해졌다는 것 외엔. -『하동』(이시영, 창비, 2017)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iotr Ilitch Tchaikovski..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백색 : 이설야

백색 / 이설야​ 백색의 처연한 슬픔을 안다고 그가 말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구름과 노을의 차이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두고 걷다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각자 멀리 걷기 시작했다. 왜 바람은 그림자가 없는 것일까? 분명히 몸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질문은 겨울이 되기 십상이었다. 우리는 점점 서로를 모르는 척하고, 각자의 집으로 한발자국씩 더 들어가고, 집을 밖에다 내다 버리고, 또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집이 되어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안은 점점 밖이 되고.​『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이설야, 창비, 2022, 27쪽)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한 사람을 위한 시 : 류시화

한 사람을 위한 시 / 류시화 세상에 대한 절망이 세상만큼 커졌을 때내가 아는 해답들이 다시 의문으로 바뀔 때나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새벽에 일어나 아득히 먼 육등성 별 세는 사람목도리도 없이다른 쇠기러기들 위해 앞장서서 얼굴로찬바람 가르는 쇠기러기 확인하는 사람마음이 힘들 때 토굴 속 은둔 수행자처럼들숨과 날숨 짚어 나가는 사람밤새 태풍 불고 지나간 아침 부서진꼬투리 속 씨앗 안부 묻는 사람겨울나무 껴안고 그 나무가안으로 준비하고 있는 꽃 손꼽아 보는 사람우연 속 필연의 숫자 새겨 두는 사람바다를 보면서 여러 샛강들 데리고 그 바다로 흘러온 강의 이름 기억하는 사람밤을 존재하게 하는잠 못 이루는 사람들 잊지 않는 사람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럼에도희망의 늦반딧불이 차례 기다리는 사람어느 문장에서나기도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