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8

하이든 피아노소나타 32번, 47번, 49번, 슈베르트 즉흥곡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박두규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박두규​ 툇마루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의심도 없이 그대를 쫓아온 세월은 아직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대의 환영幻影을 노래한 시詩들도 은어의 무리처럼 거침없이 따라 오른다. 이승의 시간이 다하기 전, 그대를 한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 생각만이 아직도 늙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강의 하류에 이르렀건만 지금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이 허튼 생각만이 남아 가여운 나를 위로한다. -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박두규, 모악, 2018, 15쪽)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피아노소나타 32번Sonate (Divertimento) Nr. 32 op. 53 Nr. 4 g-Moll Hob.XVI:44피아노소나타 47번Sonate (Divertiment..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겨울나무 : 복효근

겨울나무 / 복효근​​꽃눈은 꽃의 자세로 잎눈은 잎의 자세로 손을 모으고 칼바람 추위 속에 온전히 저를 들이밀고 서 있네 나무는, 잠들면 안 된다고눈감으면 죽는다고바람이 둘러주는 회초리를 맞으며 낮게 읊조리네 두타頭陀*의 수도승이었을까 얼음 맺힌 눈마다 별을 담고서 나무는높고 또 맑게더 서늘하게는 눈뜨고 있네 ​* 두타(頭陀) : 산야를 떠돌면서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음, 또는 그런 수행을 하는 중을 뜻한다.​​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달아실, 2017)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소식 : 이성선

소식 / 이성선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이성선, 세계사, 2000)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llemandaⅡ. DoubleⅢ. CorrenteⅣ. Double. PrestoⅤ. SarabandeⅥ. DoubleⅦ. Tempo Di BoreaⅧ. Double기돈 크레머Gidon Kremer 바이올린in front of the gleaming gold altar of the Church of St. Nikolaus in Locken..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폭설 : 류근

폭설 / 류근​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결별의 예감 한 잎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내 이름 위에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눈이 내린다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 -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 안탈 살라이 - 오늘 : 심재휘

오늘 / 심재휘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수많은 어둠들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그런 것이다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홀로 지켜보는 일에 대하여, 단지우..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입춘일기 : 이해인

입춘 일기 / 이해인 겨울이 조용히 떠나면서 나에게 인사를 합니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봄이 살그머니 다가와 나에게 인사를 합니다. 안녕! 또 만나서 반가워요 딱딱한 생각을 녹일때 고운 말씨가 필요할때 나를 이용해 주세요. 어서오세요 봄!! 나는 와락 봄을 껴안고 나비가 되는 꿈을 꿉니다. - 시집 『이해인 시전집2』(문학사상, 2013)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한 나무가 있었네 : 박남준

한 나무가 있었네 / 박남준    쉬지 않고 계율처럼 깨어나 흐르는 물소리와 저 아래로부터 일어나 온 산을 감싼 구름으로 두어 발 한세상이 자욱해질 무렵 죽어 쓰러진 나무등걸 모아 불 지핀다. 맵다. 상처처럼 일어나는 연기. 산중 나무 한 그루 태어나 숨 거두기까지 한 생각 그랬겠다 쓸쓸했을 지난날의 외로움이 울먹울먹 피어나서 이렇게 눈물나게 하는 것인지. 타오르며 전해오는 푸른 나무의 옛날. 불꽃, 참 따듯한 그리움-『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박남준, 실천문학사, 2021, 43쪽)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llemandaⅡ. DoubleⅢ. Corr..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 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 : 이병률

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 / 이병률​나 무엇이든 잘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당신 모르는 잠버릇을 기록할 수 있다면​문신을 그리겠다는 당신 살갗을 내 시간으로 쓰다듬을 수만 있다면​당신의 닳은 뼈와 기억이 되어 폭설로 잠들 수 없는 밤에 당신 역사와 내통할 수 있다면​어느 신성한 연기 되어 당신 온몸을 방부할 수 있다면​한 줄 위에 나란히 이불로 널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의 광채를 다 가질 수만 있다면​어느 생에서 한 번 당신에게 부딪혔던 작은 새의 파닥거리는 심장이 되어 당신 손아귀에서 안식할 수 있다면​그래서, 그리하여, 그럼에도 따위의 말들을 앞세운 추신들이 모두 당신에게 귀결될 수 있다면​그러고도 이 편지의 맨 끝에 꾹꾹 눌러 쓰나니 부디​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바다는 잘 있습니다>(이병률..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오늘 : 심재휘

오늘 / 심재휘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수많은 어둠들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그런 것이다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홀로 지켜보는 일에 대하여, 단지우리..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 알레나 바에바 - 곰소에서 : 이대흠

곰소에서 / 이대흠​ 나무를 덧대어 만든 커다란 소금창고는 기울어져 있었다 평생을 물에서 오신 소금을 모신 곳이었으니 여전히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이 들어와 있을 때보다 썰물 때 더 기울어져 있었다​내게 남은 것은 그대가 남기고 간 한줌 소금 같은 그리움이니!​베인 상처에 갯물이 들 때처럼 마음 안이 쓰리고그대 떠나고 나도 그대 쪽으로 기울어졌다​해가 질 것이고 바닷바람에 나는 낡아갈 것이다조금 더 기울어질 것이다​-(이대흠, 창비, 201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바이올린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878)I. Allegro moderatoII. Canzonetta: And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