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22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色, 아름다운 세상 : 박두규​

色, 아름다운 세상 / 박두규​툇마루에 앉아 강 건너 앞산바라기를 하다가 세상의 온갖 색에 젖어 마음이 촉촉해진 어느 날, 한순간 헛소리나 하는 것처럼 우연히 ‘아름다운 세상’하고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딸꾹질을 하듯 눈앞의 아름다운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내 안으로 훅, 들어왔다. 감당하기 힘든 고마움으로 한껏 순해진 마음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마음의 외출로 텅 빈 내 안은 모처럼 아름다운 지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 『은목서 피고 지는 조울躁鬱의 시간 속에서』(박두규, b, 2022, 61쪽)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

바흐 바이올린소나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 프랑크 페터 짐머만, 엔리코 파체 - 봄비 : 김소월​

봄비 / 김소월​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 앉아 우노라.​ *어룰 : ‘얼굴’의 방언(평안북도)  - 『하루 한 편 김소월을 새기다』(김소월, 영진닷컴, 202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바이올린과 쳄발로 소나타Sonata for violin and cembalo(BWV 1014-BWV 1019) 바이올린소나타 1번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B minor BWV 1014프랑크 페터 짐머만Frank Peter Zimmermann 바이올린..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민들레 : 나태주

민들레 / 나태주​우주의 한 모서리​스님들 비우고 떠나간 암자늙은 무당이 흘러, 흘러 들어와궁둥이 붙이고 사는 조그만 암자지네 발 달린 햇빛들모이는 마당가 장독대깨어진 사금파리 비집고민들레는 또 한번의 생애를서둘러 완성하고바람결에 울음을 멀리멀리까지 날려보내고 있었다​따스한 봄날의 하루.​​- 『슬픔에 손목 잡혀』(나태주, 시와시학사, 2000)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I. Allegro ma non troppoII. Larghetto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꽃의 이유 : 마종기

꽃의 이유/  마종기꽃이 피는 이유를전에는 몰랐다.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전에는 몰랐다.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잠에서 깨어나는물 젖은 바람 소리.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그 나라 하늘빛』(마종기, 문학과지성사, 200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하이든 피아노소나타 32번, 47번, 49번, 슈베르트 즉흥곡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박두규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 박두규​ 툇마루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의심도 없이 그대를 쫓아온 세월은 아직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대의 환영幻影을 노래한 시詩들도 은어의 무리처럼 거침없이 따라 오른다. 이승의 시간이 다하기 전, 그대를 한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 생각만이 아직도 늙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강의 하류에 이르렀건만 지금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이 허튼 생각만이 남아 가여운 나를 위로한다. -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박두규, 모악, 2018, 15쪽)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피아노소나타 32번Sonate (Divertimento) Nr. 32 op. 53 Nr. 4 g-Moll Hob.XVI:44피아노소나타 47번Sonate (Divertiment..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겨울나무 : 복효근

겨울나무 / 복효근​​꽃눈은 꽃의 자세로 잎눈은 잎의 자세로 손을 모으고 칼바람 추위 속에 온전히 저를 들이밀고 서 있네 나무는, 잠들면 안 된다고눈감으면 죽는다고바람이 둘러주는 회초리를 맞으며 낮게 읊조리네 두타頭陀*의 수도승이었을까 얼음 맺힌 눈마다 별을 담고서 나무는높고 또 맑게더 서늘하게는 눈뜨고 있네 ​* 두타(頭陀) : 산야를 떠돌면서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음, 또는 그런 수행을 하는 중을 뜻한다.​​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달아실, 2017)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소식 : 이성선

소식 / 이성선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이성선, 세계사, 2000)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llemandaⅡ. DoubleⅢ. CorrenteⅣ. Double. PrestoⅤ. SarabandeⅥ. DoubleⅦ. Tempo Di BoreaⅧ. Double기돈 크레머Gidon Kremer 바이올린in front of the gleaming gold altar of the Church of St. Nikolaus in Locken..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폭설 : 류근

폭설 / 류근​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결별의 예감 한 잎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내 이름 위에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눈이 내린다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 -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 안탈 살라이 - 오늘 : 심재휘

오늘 / 심재휘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수많은 어둠들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그런 것이다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홀로 지켜보는 일에 대하여, 단지우..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입춘일기 : 이해인

입춘 일기 / 이해인 겨울이 조용히 떠나면서 나에게 인사를 합니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봄이 살그머니 다가와 나에게 인사를 합니다. 안녕! 또 만나서 반가워요 딱딱한 생각을 녹일때 고운 말씨가 필요할때 나를 이용해 주세요. 어서오세요 봄!! 나는 와락 봄을 껴안고 나비가 되는 꿈을 꿉니다. - 시집 『이해인 시전집2』(문학사상, 2013)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