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32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수목장(樹木葬) : 권대웅

수목장(樹木葬) / 권대웅​​나무에게로 가리해에게도 가지 않고 달에게도 가지 않고한 그루 큰 말씀 같은 나무에게로 가리​깊고 고요한 잠나뭇잎은 떨어져 쌓이고 세상에서 나는 잊히고땅 밑을 흐르는 구름과 별들 양치식물들 눈뜨는시간 속으로 뿌리 같은 손길 하나가 다가와 나를 깨우면훅, 달의 뜨거운 호흡에 빨려드는 바닷물처럼나는 푸른 나무의 바다로 들어가리​아득하여라 나무의 바다 속바람 불고 봄이 오고 빗방울 떨어져어떤 기운이 꽃봉오리 꼭 잠긴 몸속으로나를 밀어내면 아, 나를 밀어내면비로소 알게 되리햇빛과 꽃잎과 만나 열리는 저 존재의 비밀을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하늘과 땅의 팔만대장경을​또 다시 나뭇잎은 떨어지고햇빛과 빗물과 추억은 날아가살아남은 것들의 들숨이 되고 치유가 되어이 세상 천지간 무소유로 선나무..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그리움의 모순어법 : 류시화

그리움의 모순어법 / 류시화​네가 내 곁에 왔는데도 나는 너를 기다린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내 안에서 일렁이던그리움 잃지 않기 위해사랑은 그리워하지 않음을 금하므로그리움은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남겨 두는 것이므로몇 생의 시간을 걸어문을 열고 지금 네가 내 옆에 왔는데도나는 기다린다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은 너를내 깊은 곳 어딘가에서 하염없이 오고 있는 너를부재에 의해 더 알게 되는 존재를그 어디쯤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인생이 짓궂은 장난을 치기 전으로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던그 계절 어디쯤으로너보다 먼저 비가 내리고너보다 먼저 먼 별빛 하나가 찾아오고나목의 가지 끝에서 꽃이 터진다그리움이 끝나면 너는 오지 않을 것이므로그리운 사람 더 그리워하기 위해이미 내 곁에 온 너를 나는 기다리고너를 기다리는 동안..

바흐 바이올린협주곡 1번, 2번 : 빌데 프랑, 필립 헤레베헤 - 힐러리 한, 오메르 마이어 웰버 - 안으로 우는 풍경風磬 : 복효근

안으로 우는 풍경風磬 / 복효근​​온통 울리고 가는 대신풍경 그 청동의 표면에 살짝 입만 맞추고 지나간 바람처럼​아는가, 네가아주, 잠깐, 설핏, 준 눈길에안으로 안으로 동그랗게 밀물지는 설렘의 잔물결​고요히 한생을 두고 일렁이는​-『꽃 아닌 것 없다』(복효근, 천년의 시작, 2017)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바이올린협주곡 1번Violinkonzert a-Moll BWV 1041I. Allegro moderatoII. AndanteIII. Allegro assai 프랑크푸르트방송교향악단hr-Sinfonieorchester–Frankfurt Radio Symphony빌데 프랑Vilde Frang 바이올린필립 헤레베헤Philippe Herreweg..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오늘, : 심재휘

오늘, / 심재휘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수많은 어둠들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그런 것이다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홀로 지켜보는 일에 대하여, 단지우..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6월 : 김용택

6월 / 김용택 하루 종일당신 생각으로6월의 나뭇잎에 바람이 불고하루 해가 갑니다​불쑥불쑥 솟아나는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주저앉힐 수가 없습니다​창가에 턱을 괴고오래오래 어딘가를 보고있곤 합니다​​느닷없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그것이당신 생각이었음을 압니다​하루 종일당신 생각으로6월의 나뭇잎이바람에 흔들리고해가 갑니다​― 시선집 『집』(김용택, 시인생각, 201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llemandaⅡ. DoubleⅢ. CorrenteⅣ. Double. PrestoⅤ. SarabandeⅥ. DoubleⅦ. Tempo Di BoreaⅧ. Double기돈 크레머Gid..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나무 : 류시화

나무 / 류시화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나무는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나무가 하나 있었다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비를 가려 주고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그 바람으로 숨으로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푸른숲, 1991첫판, 199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

슈베르트 피아노 소품 셋3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어떤 안부 : 나호열​

어떤 안부 / 나호열​소식은 멀리서 들어야 향기가 난다세상 떠난 지 오래인 어떤 이의 부고가산다화 필 무렵 눈에 짚이고야반도주한 모 씨가 부자가 되었다는 누더기 같은 이야기를흘러가는 강물이 귀를 씻어주듯이그리운 소식은 길이 멀어야 가슴에 메인다​-『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208쪽)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피아노 소품 셋3 Klavierstücke D. 946I. Allegro​ II. Allegretto​ III. Allegro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피아노Recorded at the Berliner Philharmonie (Berlin, Germany) on June 5, 2013 https://www..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 의외의 대답 : 천양희

의외의 대답 / 천양희 ​내가 세상에 와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강변에 나가 앉아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내가 세상에 와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강가에 서서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내가 세상에 와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무릎 꿇고 앉아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내가 세상에 와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단 한 사람이라도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나를 잃는 것 -(천양희, 창비, 202..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아카시아 : 나희덕

아카시아 / 나희덕저무는 봄날 하얀 비 맞으며나는 그 길 위로 걸어왔습니다숨막힐 듯 단내 나던 꽃송이산산이 부서져 뼛가루처럼어디론가 불려가는 날,마른 꽃잎을 한 줌 움켜보니금방이라도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당신은 얼마나 한숨을 잘 쉬시던지모두 여기 날아와 쌓인 듯합니다한숨 한 줌이렇게 되려고 달려온 건 아니었는데머리 위의 꽃비는 하염없습니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작과비평사, 1994, 35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Febr..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