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720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봄인데 말이야 - 복희 : 함순례

봄인데 말이야 / 함순례​ - 복희 ​​아파서많이 아픈 몸으로 너는 누워 있고간단없는 통증에 글썽이는 눈 파르르 떨고 있고​​나는 걷고 있지​​성내천변은 거대한 반란지대​희고 노란 봄년들이 발칙하게 손을 흔들고재개발아파트 허물어진 얼굴로 그런 봄년들을 멀거니 내려다보는데​​저 무장한 발랄함도 긴 겨울을 건너온 통증이니까아프다는 건 열망이 남아 있다는 거니까​​나는 찬란하게 걷고 있지​​이 도도한 무늬들 온몸에 빨아들이는 거지​오랜 시간 천천히 낡아간 집이 더디게 새 둥지를 틀듯거머리가 꿈틀꿈틀 나쁜 피 핥듯​​지금 밖은 온통 새살, 새살 돋아나는 봄인데 말이야병든 살을 도려낸 네 발에 고스란히 이식할 거야​너, 살아오면​​-시집 『나는 당신이 ..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序詩 : 이성복

序詩 / 이성복​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남해 금산』(이성복, 문학과지성사, 1986)​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교향곡 5번 : 알레나 바에바, 알렉산드르 라자레프 - 그리움 : 고은

그리움 / 고은 무위가 없다거리에또는 나에게넘치는 무엇무엇들 산에도 빈 메아리가 없다 내 젖먹이 적 젖내 나는 무위여 네가 그립다  -『초혼』(고은, 창비, 2016, 122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바이올린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878)I. Allegro moderatoII. Canzonetta: AndanteIII. Finale: Allegro vivacissimo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Fantasy Overture from Romeo and Juliet 뒤셀도르프심포니오케스트라Düsseldorfer Sym..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 어떤 이름 : 이기철

어떤 이름 / 이기철 어떤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에 등불 켜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나지막하고 따뜻해서 그만 거기 주저앉고 싶어진다 애린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가슴이 저며온다 흰 종이 위에 노랑나비를 앉히고 맨발로 그를 찾아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는 없다 연모란 그런 것이다. 풀이라 부르면 풀물이, 불이라 부르면 불꽃이, 물이라 부르면 물결이 이는 이름이 있다 부르면 옷소매가 젖는 이름이 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별이 뜨고 어떤 이름을 부르면 풀밭 위를 바람이 지나고 은장도 같은 초저녁 별이 뜬다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다. 부를 이름 있어, 가슴으로만 부를 이름 있어 우리의 하루는 풀잎처럼 살아 있다 ​ - 시집 『꽃들의 화장 시간』 (서정시학. 2014) 로그인..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시간들 : 안현미

시간들 / 안현미 ​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 ​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 김선우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 김선우 ​ 세상에 소음 보태지 않은 울음소리 웃음소리 그 흔한 날갯짓 소리조차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뿔도 침도 한 칸 집도 모래 무덤조차도 ​ 배추흰나비 초록 애벌레 배춧잎 먹고 배추흰나비 되었다가 자기를 먹인 몸의 내음 기억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 나뭇잎 쪽배처럼 허공을 저어 돌아온 배추흰나비 늙어 고부라진 노랑 배추꽃 찾아와 한 식경 넘도록 배추 밭 고랑 벗어나지 않는다 ​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살아도 무거운 벼랑이 몸속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배추흰나비 닻을 내린 늙은 배추 고부라진 꽃대궁이 자글자글 끓는다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김선우, 문학과지성사, 2007, 146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심 중 : 우창자

심 중 / 우창자 진달래는 떠나셨습니다. 그 커다란 산을 붉게 물들이시던 개나리는 떠나셨습니다. 그 울창한 동네 담장을 수 놓으시던 제비꽃이 오셨습니다. 작은 얼굴을 부끄러워하면서 민들레가 오셨습니다. 이미 푸르러 버린 개나리를 아쉬워하면서 심중엔 벗꽃 눈발이 휘날립니다. 1984.4.28 -우창자 글 모음 『고통의 척도를 헤아릴수 없음으로 해서』(우창자 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 Assai vivace III. Adagio sostenuto IV. Introduzi..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그대 생각​ : 고정희

그대 생각​ / 고정희 ​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 - ​『아름다운 사람 하나』(고정희, 도서출..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봄비 : 김소월

봄비 / 김소월 ​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 앉아 우노라. ​ - 『하루 한 편 김소월을 새기다』(김소월, 영진닷컴, 2022)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목련 : 류시화

목련 / 류시화 ​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류시화, 푸른숲, 2008)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