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731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목련 : 류시화

목련 / 류시화 ​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류시화, 푸른숲, 2008)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슈만 푸가 넷, 분테 블레터(다채로운 소곡), 쇼팽 폴로네이즈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천왕봉을 오르며 : 김인육

천왕봉을 오르며 / 김인육 ​ 산에 올라보면 안다 그리움이 어떻게 산이 되는가를 함묵의 봉우리가 울어 울어 더욱 깊어지는 내력을 그 눈물이 흘러 바다가 되는 세월을 바닷물이 왜 눈물의 맛인가를 안다. ​ 지리산은 선 채로 억 년을 비에 젖고 선 채로 억 년을 울음 운다 그렇다고, 그 기다림의 당위나 애련의 연유에 대해선 묻지마라 간절한 부름은 귀에 닿지 않고 영혼에 가 닿는 법 ​ 사랑아, 나도 너에게 그렇게 왔다. ​ ​ 『사랑의 물리학』(김인육, 문학세계사, 2016)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 ~ 1856) 푸가 넷4 Fugen, Op. 72 1. in D minor, Nicht schnell 2. in D minor, Sehr lebhaft 3. in F minor, Nic..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기억한다 : 류시화

기억한다 / 류시화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래된 상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쓴 시인을 기억한다 ​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을 간직한 사람이 많은 것이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라고 말한 시인을 기억한다 ​ 상처 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고 쓴 시인을 기억한다 ​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에 자신이 미워졌다고 고백한 시인을 기억한다 ​ 눈사람에게 추워도 불 가까이 가지 말라고 충고한 시인을 기억한다 ​ 끝까지 울며 마지막 울음 속에 웃음이 숨어 있다고 말한 시인을 기억한다 ​ 사람이니까 넘어져도 괜찮다고 쓴 시인을 기억한다 ​ 나는 정원사이자 꽃이라고 노래한 시인을 기억한다 ​ 언제부터 시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언제부터 시인이기를 그만두었느냐고 되물은 시인을 기억한다 ​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느냐고 물은..

베토벤 '코리올란' 서곡, 피아노협주곡 2번, 1번 : 엘리소 비르살라제 - 민들레 : 나태주

민들레 / 나태주 ​ 우주의 한 모서리 ​ 스님들 비우고 떠나간 암자 늙은 무당이 흘러, 흘러 들어와 궁둥이 붙이고 사는 조그만 암자 지네 발 달린 햇빛들 모이는 마당가 장독대 깨어진 사금파리 비집고 민들레는 또 한번의 생애를 서둘러 완성하고 바람결에 울음을 멀리 멀리까지 날려보내고 있었다 ​ 따스한 봄날의 하루. ​ ​- 『슬픔에 손목 잡혀』(나태주, 시와시학사, 2000)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코리올란' 서곡Coriolan-Ouverture, Op. 62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협주곡 2번Klavierkonzert Nr. 2 in B-Dur, Op.19 ..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꽃의 이유 : 마종기

꽃의 이유/ 마종기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그 나라 하늘빛』(마종기, 문학과지성사, 200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 허연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 허연 ​ 수도원에서 도망쳤다 ​ 신을 대면하기엔 나는 단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 짐을 싸들고 욕망이 쏟아져 내려오던 비탈길을 내려왔다 ​ 모든 걸 다해 단 몇 줄로 정리된 나를 바치고 싶었지만 ​ 반찬도 없이 식은 밥을 먹으며 구멍 난 튜니카를 꿰매며 잊혀도 좋으니 거룩하고 싶다고 천 번을 되뇌었지만 ​ 그레고리안 성가가 안개처럼 흘러다니는 산길을 버렸던 단어들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내.려.왔.다. ​ 고통받는 삶의 형식이 필요했다 ​ 시를 쓰면서 슬픔에 슬픔을 보태거나 죽음에 죽음을 보태는 일을 했다 ​ ​ - 시선집 『천국은 있다』 (허연, 아침달, 2021, 18-19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산수유꽃 : 박형준

산수유꽃 / 박형준 ​ 논둑에 앉아 산수유를 바라봅니다 얕은 구릉에 무리져 핀 산수유가 논바닥 웅덩이에 비칩니다 빛이 꽃 그림자에서 피어납니다 저쪽에서부터 농부가 황소를 몰고 생땅을 갈아엎고 있습니다 논바닥 웅덩이가 흔들립니다 땅에서 향내가 솟구칩니다 소발굽에서 물집 잡힌 저 산수유꽃 그늘 이런 아침에 당신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산간마을의 봄빛이 저만큼 깊습니다 ​ -『춤』(박형준, 창비, 2005)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

브루크너 교향곡 9번 : 이반 피셔 - 삶 : 김용택

삶 / 김용택 ​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종일이다.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 ​ -(김용택, 위즈덤하우스, 2015)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1824~1896) 교향곡 9번Sinfonie Nr. 9 d-..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오십 미터 : 허연

오십 미터 / 허연 ​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맨 처음의 봄 : 오광수

맨 처음의 봄 / 오광수 봄꽃이란 봄꽃 다 피었을 때 우리 생도 피었으면 좋겠네 그늘 속 숨죽이던 이끼도 연파랑 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네 산수유는 이미 노랗고, 개나리는 저리도 환한데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목련꽃 아래서 입맞춤 하던 순간 혼절하듯 숨을 멈추던 당신 시나브로 청춘은 시들어 이제는 꽃이 진자리 송홧가루 흩날리는 지상에서 아직도 네가 그리운 건 지병인거야 봄꽃이란 봄꽃 다 질 때 우리 생도 저물었으면 좋겠네 당신과도 그냥 지나는 소문처럼 찰나의 어디쯤서 스쳤으면 좋겠네 구절초 같은 남루, 먼지 쌓인 민들레인들 어떤가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맨 처음의 봄 꽃 진 자리, 꽃이 필 자리 ​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오광수, 애지, 2019)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