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731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주일 2 : 천상병

주일 2 /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현대시학』, 1969. 11 『천상병 시선』(천상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7-18쪽)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전주곡 열Preludes, Op. 23 No. 1 in F-sharp minor: Largo No. 2 in B-flat major: Maestoso No. 3 in D minor: Temp..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강물 : 천상병

강물 /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천상병, 미래사, 1991)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 I. Maestoso-Allegro con brio ed appassionato II. Arietta-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

드보르자크 피아노오중주 2번 : 오이스트라흐현악사중주단, 엘리소 비르살라제 -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 : 이능표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 / 이능표 ​ ​ 강물을 따라 송어 떼가 지나갔다. “저들은 다시 오지 않아!”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발목을 적시는 희미한 불빛처럼 사랑하냐고 그녀가 묻고 그립다고 그가 대답했다. 새벽 두 시의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강물을 거슬러 송어 떼가 돌아왔다. “그때 그 송어가 아니야!”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발목을 적시는 희미한 불빛처럼 사랑하냐고 그녀가 묻고 그립다고 그가 대답했다. 새벽 두 시의 통화는 늘 그렇게 끝이 났다. 강물이 강물을 밀어내듯 천금 같은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 -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달아실, 2024) . 로그인만 하면 그냥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새 : 천상병

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사상계』, 1959. 5 / 『천상병 시선』(천상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24-25쪽)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 I. Maestoso-Alleg..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사람의 일 : 천양희

사람의 일 / 천양희 ​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시집 『오래된 골목』(창비, 2003)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당신의 문체 : 강연호

당신의 문체 / 강연호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당신 당신에 대한 기억은 귀로 시작되더군 당신은 서술어를 잠시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고 당신은 부정인지 긍정인지 모를 표정을 자주 짓고 그럴 때 세상은 비스듬히 깊어지는 것이어서 나는 내 속내를 털어놓는 줄도 모르고 다 털어놓아야 했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먼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지요 이쯤 해서는 내 입술이 당신의 귀에 살짝 닿기도 했을라나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누가 한 말은 탄식일까요 비명일까요 완성이었다면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도대체 생겼겠어요? 유행가 가사에 인생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줄줄 나를 흘리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못 이겨 조금씩 말이 늘어지고 서술어를 잠시 머뭇..

브람스 피아노소나타 1번, 리스트/슈베르트 가곡(피아노 편곡),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 적멸 : 강연호

적멸 / 강연호 ​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 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동안 베껴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 ​ ​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브람스 헝가리 춤곡 : 가브리엘 베베셀레아 - 연두의 내부​ : 김선우

연두의 내부​ / 김선우 ​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 부산한 발소리 상상한다 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한 걸 거라고 ​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 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 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 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 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 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 아마도 사랑하는 일처럼 ​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김선우, 창비, 2012)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1786-1826) ‘무도회의 권유’"Invitation to Dance" (orc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