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5

슈만 푸가 넷, 분테 블레터(다채로운 소곡), 쇼팽 폴로네이즈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산수국 : 허형만

산수국 / 허형만​ 흐벅지게 핀 산수국 오져서차마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가담가담 오시어 가만히 들여다보는여우비 갈맷빛 이파리마다 조롱조롱매달려 가슴 졸이는 물방울​나에게도 산수국처럼 탐스러웠던시절 있었지 물방울처럼 매달렸던사랑 있었지 오지고 오졌던 시절한 삶이 아름다웠지한 삶이 눈물겨웠지​ - 『가벼운 빗방울』(허형만, 작가세계, 2015)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 ~ 1856)푸가 넷4 Fugen, Op. 72 1. in D minor, Nicht schnell 2. in D minor, Sehr lebhaft 3. in F minor, Nicht schnell und sehr ausdrucksvoll 4. in F major, Im mäßigen Tempo - etwas..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걸음을 멈추고 / 나희덕​그 나무를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당신을 용서한 것은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손바닥』(나희덕,..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難讀의 시간 : 김은숙

난독難讀의 시간  / 김은숙​​​보이지 않던 마음이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수렁같이 깊었던 내 난독의 씨실 날실이돋을새김으로 드러난다​헤아리지 못한 마음들제대로 읽지 못한 생각들외면의 차가운 순간이 살아나심장 안쪽을 깊숙이 찌르고비척비척 홀로 걸어갔을 쓸쓸한 걸음들이내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 저녁​깊이 읽혀지는 것이 많아지자비로소 보이는 칠흑 같던 내 난독의 시간지워질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휘청, 가슴 저미며 파고드는뜨거운 뒷모습의 부답不答​- 『그렇게 많은 날이 갔다』(김은숙, 고두미, 2022)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I. Maestoso-Allegro c..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따뜻한 책 : 이기철

따뜻한 책/이기철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서서 읽는 사람아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것은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가장 따뜻한 책》(이기철, 민음사, 2005)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길거리에 나서면고향 장거리 길로소 팔고 돌아오듯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어느 곳에선가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마음의 문들은 닫히고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눈물자국 때문에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시집 『국수가 먹고 싶다』(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나호열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 나호열  유채꽃밭에 서면 유채꽃이 되고높은 산 고고한 눈을 보면 눈이 되고불타오르는 노을을 보면 나도 노을이 되고겨울 하늘 나는 기러기 보면그 울음이 되고 싶은 사람아어디서나 멀리 보이고한시도 눈 돌리지 못하게 서 있어눈물로 씻어내는 청청한 바람이려니지나가는 구름이면 나는 비가 되고나무를 보면 떨어지는 나뭇잎 되고시냇물을 보면 맑은 물소리가 되는 사람아하루하루를 거슬러 올라와깨끗한 피돌기로 내 영혼에 은어 떼가 되리니나는 깊어져가고너는 넓어져가고그렇게 내밀한 바다를 만들어가는어디에 우리의 수평선을 걸어놓겠느냐목숨아, 사람아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36쪽)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모차르트 피아노사중주 1번, 차이콥스키 피아노삼중주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 파벨 밀류코프, 소피아 레베드, 알렉산더 루딘, 미하일 플레트 네프 - 바람에 실어 : 박남준

바람에 실어 / 박남준​​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아미 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 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 피워올리니 따듯한 불기가 간절하구려.​보고 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듯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박남준, 문학동네, 2000)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소면 : 류시화

소면 / 류시화 ​​당신은 소면을 삶고나는 상을 차려 이제 막꽃이 피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서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에 있어 온오래된 나무 아래서국수를 다 먹고 내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포개 놓은 뒤 당신은나무의 주름진 팔꿈치에 머리를 기대고잠시 눈을 감았다그렇게 잠깐일 것이다잠시 후면, 우리가 이곳에 없는 날이 오리라열흘 전 내린 삼월의 눈처럼봄날의 번개처럼물 위에 이는 꽃과 바람처럼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우리는 부재하리라그 많은 생 중 하나에서 소면을 좋아하고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던우리는 여기에 없으리라몇 번의 소란스러움이 지나면나 혼자 혹은 당신 혼자이 나무 아래 빈 의자 앞에 늦도록앉아 있으리라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전부인가이제 막 꽃을 피운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우리는..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 차이콥스키 '만프레드' 교향곡 : 알렉산드르 루딘, 알렉산드르 라자레프 - 여름날 : 허형만

여름날 / 허형만- 성모 마리아​제가 당신의 그림자 끝에서도평화와 안식을 꿈꿀 수 있음은먼길 부르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때로는 천둥 치고 벼락 치는그토록 긴긴 세월 속에서도푸른 바람과 넉넉한 기쁨으로이 여름을 지탱할 수 있음은제가 당신의 서러움까지도고이 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늘 당신 가까이에 있고당신은 저로부터 멀리 계시나눈빛만으로도 손길만으로도눈물겨운 사랑을 전할 수 있음은참으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비 잠시 그친 뒤』(허형만, 문학과지성사, 1999)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1841 ~ 1904)첼로협주곡Cellokonzert h-Moll op. 104, B. 191I. AllegroII. Adagio, ma non trop..

브루크너 교향곡 9번 : 마리스 얀손스, 이반 피셔 - 삶 : 김용택

삶 / 김용택 ​매미가 운다.움직이면 덥다.새벽이면 닭도 운다.하루가 긴 날이 있고짧은 날이 있다.사는 것이 잠깐이다.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하루종일이다.내 곁에 앉은주름진 네 손을 잡고한 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또 무슨 낙이 있을까.매미가 우는 여름날새벽이다.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맑은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김용택, 위즈덤하우스, 2015)       알반 베르크Alban Berg(1885~1935)바이올린 협주곡Violinkonzert'한 천사를 기억하며‘»Dem Andenken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