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731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천양희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천양희​마음 끝이 벼랑이거나하루가 지루할 때마다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여러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에도 뼈가 있다고 ..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나호열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 나호열  유채꽃밭에 서면 유채꽃이 되고높은 산 고고한 눈을 보면 눈이 되고불타오르는 노을을 보면 나도 노을이 되고겨울 하늘 나는 기러기 보면그 울음이 되고 싶은 사람아어디서나 멀리 보이고한시도 눈 돌리지 못하게 서 있어눈물로 씻어내는 청청한 바람이려니 지나가는 구름이면 나는 비가 되고나무를 보면 떨어지는 나뭇잎 되고시냇물을 보면 맑은 물소리가 되는 사람아하루하루를 거슬러 올라와깨끗한 피돌기로 내 영혼에 은어 떼가 되리니나는 깊어져가고너는 넓어져가고그렇게 내밀한 바다를 만들어가는어디에 우리의 수평선을 걸어놓겠느냐목숨아, 사람아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36쪽)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 고정희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 고정희   오월의 융융한 햇빛을 차단하고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악귀를 쫓아내듯 신열과 싸우며 집 안에 가득한 정적을 밀어내며 당신이 오셨으면 하다 잠이 듭니다  기적이겠지 기적이겠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이 대낮에 이심전심이나 텔레파시도 없는 이 대낮에 당신이 내 집 문지방을 들어선다면 나는 아마 생의 최후 같은 오 분을 만나고 말거야 나도 최후의 오 분을 셋으로 나눌까 그 이 분은 당신을 위해서 쓰고 또 이 분간은 이 지상의 운명을 위해서 쓰고 나머지 일 분간은 내 생을 뒤돌아보는 일에 쓸까 그러다가 정말 당신이 들어선다면 나는 칠성판에서라도 벌떡 일어날거야 그게 나의 마음이니까 그게 나의 희망사항이니까… 하며 왼손가락으로 편지를 쓰다가 고요의 밀림 속으로 들어..

브람스 바이올린소나타 2번,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4번, 슈만 바이올린소나타 1번 :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1946-1994)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아무리 아쉬워도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나지 못할 수 있다.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제각기 모두 제철을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혹 그 언제인가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서로 속살일 것이다.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어느 한 가슴에도메아리의 먼 여운조차남기지 못할 수 있다.그러나 삶의 노래가왜 멎어야 하겠는가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영원도 있어희망이 있다.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내가 어찌 마지막으로눈을 감는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 - 1897), 바이올린소나타 2번Sonata..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아카시아 : 나희덕

아카시아 / 나희덕​저무는 봄날 하얀 비 맞으며나는 그 길 위로 걸어왔습니다숨막힐 듯 단내 나던 꽃송이산산이 부서져 뼛가루처럼어디론가 불려가는 날,마른 꽃잎을 한 줌 움켜보니금방이라도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당신은 얼마나 한숨을 잘 쉬시던지모두 여기 날아와 쌓인 듯합니다한숨 한 줌이렇게 되려고 달려온 건 아니었는데머리 위의 꽃비는 하염없습니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작과비평사, 1994, 35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해뜨기 전에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저문 바닷가에 홀로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열림원, 2014, 48-49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 알레나 바에바, 알렉산드르 라자레프 - 봄날의 심장​ : 마종기

봄날의 심장​ / 마종기​어느 해였지?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며 웃던 날,그런 계절에는 죽고 사는 소식조차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어느 해였지?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마흔두 개의 초록』(마종기, 문학과지성사, 2015)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봄비 : 김소월

봄비 / 김소월​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 앉아 우노라.​- 『하루 한 편 김소월을 새기다』(김소월, 영진닷컴, 2022)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I. Allegro ma non troppoII. Larghetto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교향곡..

바흐 바이올린소나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 프랑크 페터 짐머만, 엔리코 파체 -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교향곡 5번 : 알레나 바에바, 알렉산드르 라자레프 - 아, 오월 : 김영무

아, 오월 / 김영무 ​파란불이 켜졌다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횡단보도 흑백 건반 탕탕 퉁기며오월이 종종걸음으로 건너오면 아, 천지사방 출렁이는금빛 노래 초록 물결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김영무, 창작과비평사, 1998)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바이올린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878)I. Allegro moderatoII. Canzonetta: AndanteIII. Finale: Allegro vivacissimo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Fantasy Overture from Romeo and Ju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