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09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12월 : 문계봉

12월 / 문계봉 이제 이곳은 겨울, 몇 사발의 그리움과서너 개의 소문들로 견뎌야 하는 계절이미 들판 여기저기선 불이 오르고창문마다 방풍(防風) 비닐이 쳐졌는데도겨울은 선뜻 마을로 들어와가난한 살림들을 위협하지 않는다아는 것일까 12월떠날 것들 이미 다 떠나고이곳엔 살 부비는 사랑만이 남아 있음을하지만 무엇인가 이 마음,모든 것들이 숙면을 준비하며 분주한 이때자꾸만 돌아보며 흔들리는 마음,새해가 오고 다시 싸락눈 뿌리며최후로 겨울이 떠난다 해도잘 가라 손짓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이 마음은.​-『너무 늦은 연서』(문계봉, 실천문학사, 2017)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

바흐 무반주첼로모음곡 : 마르크 코페이 -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류시화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류시화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둘이라는 것을이제야 깨닫습니다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당신을 알기 전에는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당신을 알기 전에는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알베르 카뮈가 시인 르네 샤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류시화, 수오서재, 2024, 16쪽)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무반주첼로모음곡(Suite..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슈게이징-스노글로브 : 김병호

슈게이징-스노글로브 / 김병호​ 먼 데에서 안부가 도착합니다 슬픔과 파도를 구분할 수 없는 수조 같습니다​ 하루쯤 더, 기다릴 게 남은 것 같습니다 허공의 돌팔매질처럼 비행기가 낮게 날자 창문마다 매달린 얼굴들이 쏟아집니다​ 누군가 그늘 속에서 휘파람을 붑니다 휘파람은 허공에 구멍을 파고 쓸쓸한 거짓말을 묻기에 좋은 깊이를 갖습니다​ 몰래 당신을 심습니다 밤이 새도록 물컹거리는 자리를 두 무릎과 먼 날로 다집니다​ 지워지지 않은 비행운 속엔 혼잣말과 울음과 먼 길이 가득합니다 당신은 헤어진 적이 없는 사람처럼 먼 지평선을 걷습니다​ 꽤 괜찮은 불행을 꿈꿉니다 언덕도 없이 절벽도 없이 지평선 끝에서 지워지는 안부가 노래라는 걸 한참 후에야 배웠습니다​ 불행 하나 없는 불행은 당신의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물..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첫눈 : 김용택

첫눈 / 김용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시집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마음산책, 2021)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I. Allegro ma non troppoII. Larghetto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교향곡15번Symphonie Nr. 15 A-Dur, op. 141I. AllegrettoII. Adagio–LargoIII. AllegrettoI..

바흐 바이올린협주곡 1번, 2번 : 빌데 프랑, 필립 헤레베헤 - 힐러리 한, 오메르 마이어 웰버 - 가을을 지나는 법 : 나호열

가을을 지나는 법 / 나호열​가을은 느린 호흡으로멀리서 걸어오는 도보여행자​점자를 더듬듯손길이 닿는 곳마다오래 마음 물들이다가툭 투우욱떨어지는 눈물같이곁을 스치며 지나간다​망설이며 기다렸던 해후의목멘 짧은 문장은그새 잊어버리고내 몸에 던져진 자음 몇 개를또 어디에 숨겨야 하나​야윈 외투 같은 그림자를 앞세우고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가을 도보여행자​이제 남은 것은채 한 토막이 남지 않은생의 촛불바람이라는 모음​맑다​-『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나호열, 문학의전당, 2017)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바이올린협주곡 1번Violinkonzert a-Moll BWV 1041I. Allegro moderatoII. AndanteIII. ..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11월 : 나희덕

11월 /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뿌리에게』(나희덕, 창비, 2019)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Ⅰ. AllemandaⅡ. DoubleⅢ. CorrenteⅣ. Double. PrestoⅤ. SarabandeⅥ. ..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돌아다보면 문득>(정희성, 창비, 2008)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11월 : 이외수

11월 / 이외수​세상은 저물어길을 지운다.나무들 한 겹씩마음 비우고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독약 같은 사랑도문을 닫는다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바람은 어디로 가자고내 등을 떠미는가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서쪽 하늘에 걸려젖은 별빛으로흔들리는 11월​​-『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 쉴 때까지』(이외수, 해냄출판사, 2010, 65쪽)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I. AllegroII. Scherzo : Assai vivaceIII. Adagio sostenutoIV. Introduzione : Largo...Alle..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협주곡 1번 : 막심 벤게로프, 파벨 밀류코프 - 소포 : 이성선

소포/ 이성선​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아래노란 들국화 몇 송이한지에 정성 들여싸서비밀히 당신에게 보내 드립니다.​이것이 비밀인 이유는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당신만이 이 향기를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당신 찾아가겠습니다.​​- 『시 읽는 기쁨 2』(정효구, 작가정신, 2014)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j Schostakowitsch(1906-1975)바이올린협주곡 1번Violin..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분꽃 : 곽재구

분꽃/ 곽재구​화장터 창가에 서서무지개를 바라보는 사람은무지개를 꽃병에 꽂아두고 싶었다멍석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아보리수제비를 먹을 때면돌담 곁 분꽃이 수북수북 피었다한 그릇 더 먹으렴수제비는 쉬 배가 꺼진단다볼 움푹 팬 목소리가 들리고개밥바라기 곁으로 별똥이 지나갔다고개 꺾어 보지 마렴사랑 하는 이가 떠나지 못한단다분꽃 씨앗 하얗게 돌에 찧어그이의 주름살에 발라주었는데연소실 불꽃 속에서툭툭 분꽃이 피어난다어서 가세요 편지할게요우체국도 우편번호도 알 수 없는허공의 창밖에 분꽃이 피고생수병에 무지개를 꽂는 사람이 있었다​-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곽재구, 문학동네, 2019)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