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5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우산을 쓰다 : 심재휘

우산을 쓰다 /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오래전부터 진창이었다고쓰지 않는다우산을 쓴다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심재휘, 최측의 농간, 2017, 94-95쪽)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무반주바이올린 파..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번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재권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재권 살다보면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별 소식이 없는 듯 이리 살아도마음 한편엔 보고픈 그리움 두어보고 싶을 때면 살며시 꺼내보는사진첩의 얼굴처럼 반가운 사람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참동안 뜨음하여 그립다 싶으면잘 지내느냐고 이메일이라도 띄워안부라도 물어보고 싶어지는풋풋한 기억 속에 있는 사람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왠지 붙잡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세월이 흘러 그만 잊은 듯하여도문뜩 문뜩 생각에 설렘도 일어그렇듯 애틋한 관계는 아닐지라도막연한 그리움 하나쯤은 두어가슴에 심어두고 싶은 사람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다 소식이 궁금해지면잘 있는 거냐고, 잘 사는 거냐고휴대폰 속에 젖은 목소리라도살포시 듣고 싶..

프랑크 전주곡, 푸가와 변주곡, 라벨 소나티네, 탈베르크 벨리니 ‘라 손남불라’(몽유병의 여인) 그랜드 카프리스, 슈만 환상소곡집, 리스트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왈.. -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 김현태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 김현태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이란잠자리 날개가 바위에 스쳐,그 바위가 눈꽃처럼 하이얀 가루가 될 즈음,그때서야 한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이 인연이라고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등나무 그늘에 누워같은 하루를 바라보는 저 연인에게도분명, 우리가 다 알지 못할눈물겨운 기다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겨울꽃보다 더 아름답고,사람 안에 또 한 사람을 잉태할 수 있게 함이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라고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나무와 구름 사이바다와 섬 사이그리고사람과 사람 사이에는수 천, 수 만 번의 애닯고 쓰라린잠자리 날개짓이 숨쉬고 있음을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은,서리처럼 겨울담장을 조용히 넘어오기에한 겨울에도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먹구름처럼 흔들거리더니대뜸,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김용택​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산다는 것이나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그 숲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왔습니다​- 『그 여자네 집』(김용택, 창비, 1998, 11쪽)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文章』(1939년 8월호)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이육사, 시인생각, 2012)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드보르자크 피아노오중주 2번 : 오이스트라흐현악사중주단, 엘리소 비르살라제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 이외수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 이외수 저녁비가 내리면시간의 지층이허물어진다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한 겹씩 파내려 가면먼 중생대 어디쯤화석으로 남아 있는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그 때도 나는한 줌의 고사리풀바람이 불지 않아도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꿈꾸고 있었을까저녁비가 내리면시간의 지층이허물어진다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이외수, 고려원미디어, 2000)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1732-1809)피아노삼중주 19번Piano Trio in F major, Hob. XV:6Ⅰ. VivaceⅡ. Tempo di minuetto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

브루크너 교향곡 9번 : 마리스 얀손스, 이반 피셔 - 삶 : 김용택

삶 / 김용택 ​매미가 운다.움직이면 덥다.새벽이면 닭도 운다.하루가 긴 날이 있고짧은 날이 있다.사는 것이 잠깐이다.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하루종일이다.내 곁에 앉은주름진 네 손을 잡고한 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또 무슨 낙이 있을까.매미가 우는 여름날새벽이다.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맑은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김용택, 위즈덤하우스, 2015)       알반 베르크Alban Berg(1885~1935)바이올린 협주곡Violinkonzert'한 천사를 기억하며‘»Dem Andenken e..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여섯 : 니콜라이 루간스키 - 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 박정대

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 박정대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다  한때 모든 노래는 혁명이었다​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차였다​  반짝이는 차창의 불빛조차도 일종의 혁명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리움의 힘으로 마시고  설움의 목울대로 노래하였으나​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위한 복무는 아니었다​  내가 떠나온 그 무엇을 위해서도 복무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 복무했으니  오 미천하고 비루했던 사랑이여​  나는 이제 이 별에서의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나는 이제 이 별에서의 이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다른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이 행성의 삶에 속하..

바흐 영국 모음곡 2번, 쇼팽 발라드,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리스트 ‘슬픔의 곤돌라’, 피아노소나타 B단조 :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 박정대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 박정대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름 폭풍은 내 마음속에 있었소  폭풍우 치는..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여름날 / 허형만

여름날 / 허형만- 성모 마리아​제가 당신의 그림자 끝에서도평화와 안식을 꿈꿀 수 있음은먼길 부르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때로는 천둥 치고 벼락 치는그토록 긴긴 세월 속에서도푸른 바람과 넉넉한 기쁨으로이 여름을 지탱할 수 있음은제가 당신의 서러움까지도고이 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늘 당신 가까이에 있고당신은 저로부터 멀리 계시나눈빛만으로도 손길만으로도눈물겨운 사랑을 전할 수 있음은참으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비 잠시 그친 뒤』(허형만, 문학과지성사, 1999)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