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 2021)
때글은 : 때에 그은. 때가 묻어 검게 된. '글다'는 '그을다'의 준말
생각하는 내 : 생각하는 동안. '내'는 '동안'의 의미.
앞대 : 평안도에서 보아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
개포 : '개'의 평북 방언.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이즈음에 이르러.
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또는 그런 힘. 이 시에서는 '힘으로 몰아붙이는 듯이'로 풀이된다.
눈질 : 눈짓.
귀해하고 : 귀하게 여기고.
바구지꽃 : 박꽃.
짝새 : 뱁새.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 Assai vivace
III. Adagio sostenuto
IV. Introduzione : Largo...Allegro - Fuga : Allegro risoluto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피아노
Recorded at the Berliner Philharmonie (Berlin, Germany) on June 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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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gory Sokolov plays Beethoven Piano Sonata No 29 in B flat major Hammerklavier_哔哩哔哩_bilib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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