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의는 철학에 입문하려는 분들을 위해 기초 개념들을 검토해 보는 자리입니다. 말하자면 철학이라는 세계의 문을 여는 강의라고 할 수 있겠죠. 어떤 세계든 그 문을 열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그 세계의 입구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개념들입니다. …… 그 중에서도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재규정되고 있는 개념들, 즉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폐기되는 개념들이 아니라 끝없이 재규정되는 그런 개념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개념들, 즉 일상어이기도 하고 철학 개념이기도 한 그런 개념들이죠. 존재와 무, 우연·가능·필연, 하나와 여럿, 무한과 유한 등등의 개념들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고 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개념들입니다. 나는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개념-뿌리들이라고 부릅니다. 개념-뿌리들의 역사를 검토하는 작업, 즉 ‘개념사’는 관심 분야에 상관없이 모든 사유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서강’ 중에서)
P. 514 한국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상업적-자본주의적 개인주의만이 있을 뿐이죠.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중의 형성이 절실합니다.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넓고 느슨한 의미-를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사회 정의를 비롯해 사회적인 차원이 건강해야 그 안에 개개인의 의미도 살아나기 때문이죠. 역으로 개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에 불과합니다.
<개념-뿌리들의 중요성>
우리 삶에서 개념이 왜 중요한가? 만약 개념이 없다면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흘러가는 물처럼 지나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그것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념이 경험을 포착해 주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막연하고 모호했던 경험들이 개념을 통해서 정리가 되고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개념은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한 물리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문화적 존재로 만들어 준다.
특히, 이 책에서 문제 삼고 있는 개념들은 수천 년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재규정되고 있는 개념들이다. 즉 일상어이기도 하고 철학 개념이기도 한 개념들인 것이다. 존재와 무, 우연, 가능, 필연, 하나와 여럿, 무한과 유한 등등의 개념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개념들이다. 이렇게 일상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한 개념들은 개념들 중에서도 난해하고 복잡하다. 각 개념에 사유의 역사가 접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 속에 접혀 들어가 있는 사유의 역사, 즉 개념-뿌리들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그리고 개념-뿌리들의 역사를 검토하는 작업, 즉 ‘개념사’(槪念史)는 관심 분야에 상관없이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초이다. 철학이 인간 활동의 기초라면, 그 철학의 기초는 개념-뿌리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기초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현대의 최신 철학을 접해 봐야 막연한 이해에 그칠 뿐이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사유>
개념들은 철학 개념, 경제학 개념, 생물학 개념 등등 분야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도 있고, 고대, 중세, 근대 등 시대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역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개념-뿌리들의 대다수는 그리스 문명, 인도 문명, 동북아 문명, 이 세 문명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까지 우리가 쓰고 있는 핵심적이고도 기본적인 개념-뿌리들은 대부분 그리스 문명에서 발아하였다. 오늘날의 철학 지형도를 놓고 볼 때 그리스 철학을 정확하게 알면 철학세계 절반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이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데리다나 들뢰즈 철학도 그리스 철학에 정통하면 접근하기 어렵지 않은 사유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서구 철학들이 그리스 철학을 변형시킨 것들이거나 극복하면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북아 철학 전통도 간과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첫째,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체의 전통과 인도 전통, 서구 전통이라는 세계철학사의 3대 갈래를 모두 흡수한 전통이기 때문이고, 둘째 오늘날도 여전히 동북아 세계에, 즉 우리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 그렇기 때문에 이 철학 전통은 모든 개념-뿌리들이 혼효되어 있는, 개념들의 용광로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재료들이 널려 있을 뿐 융합되어 보편적인 것으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정체된 상태로 남아 있는 듯 보인다.
이 책은 개념-뿌리들을 펼치는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으로 먼저 향하지만, 동북아적 맥락을 놓치지 않고 함께 설명함으로써 종합 내지는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다. 예컨대 ‘존재’를 설명할 때는 먼저 그리스로 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말했다가, 동북아로 와 유(有), 무(無), 공(空), 태극(太極) 등의 개념을 말한 뒤, 마지막으로 현대 존재론을 정리해 주는 식이다. 즉, 개념-뿌리를 깊게 드리울 수 있도록 체계적인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나 현대 철학에 바로 뛰어들다 질식하기보다 이 책 『개념-뿌리들』을 통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 개념들의 처음으로 돌아가 차분히 사유의 기초를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