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영형에게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아주 빠르게 완전히 다른 때로 데려다주는 것 같아요. 형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낙엽은 지고 눈이 오고 움이 트고 또 꽃이 피었습니다. 형이 계시던 월롱창고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올해도 개나리가 피었다 졌습니다. 책을 묶는 소리와 지게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도 나죠. 달라진 게 있다면 그 공간을 지배하던, 그 공간에서만큼은 왕으로 군림했던 형의 모습이 이젠 보이지 않는다는 것.
형은 제 20대 시절의 영웅이자 멘토였고, 형의 열정과 지혜는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하지만 형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멀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요. 또 형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모든 순간들이 저를 성장하게 했어요.
저는 은수와 선희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형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감히 그 아픔에 다가가기도 두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 나를 자책할 때도 있었고 형의 아픔을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요. 왜 더 자주 안부를 묻지 못했는지,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는지 후회가 됩니다.
형은 먼저 갔지만 저에게 남겨준 것이 많습니다. 형은 저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더 적극적으로 듣게 했고, 위대한 음악가들이 남긴 작품에 더 자주 감탄할 수 있게 했어요. 그래서 문득문득 형이 생각나곤 해요. 그럴 때마다 형의 달관한 듯한 웃음과 따뜻한 유머와 정성어린 격려가 그리워요. 다시 형의 목소리와 웃음을 들을 수는 없지만 힘든 순간마다 저를 지탱하게 하고 위로했던 그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겠습니다.
저의 인생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형과 함께여서 따뜻하고 다정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겠습니다. 형이 저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었던 것처럼 저도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는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무엇보다 내 삶의 영웅이 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내 삶을 살겠습니다.
이제 월롱창고 주변의 나뭇잎들도 다 지고 바람에 나뭇잎들이 뒹굴겠지요. 차가운 바람으로, 따뜻한 바람으로, 시원한 바람으로, 비를 부르는 바람으로, 천 개의 바람으로 오세요. 그래서 월롱창고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로, 간혹 바람에 흔들려 영롱하게 부딪치는 풍경소리로 존재해 주세요.
재영형의 편안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은숙 드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
'악흥의 순간' 여섯Six moments musicaux, Op. 16 (1896)
Ⅰ.Andantino in B-flat minor
Ⅱ.Allegro in E-flat minor
Ⅲ.Andante cantabile in B minor
Ⅳ.Presto in E minor
Ⅴ.Adagio sostenuto in D-flat major
Ⅵ.Maestoso in C major
니콜라이 루간스키Nikolai Lugansky 피아노
https://www.youtube.com/watch?v=RI-m3Z3YhgY&t=26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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