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

[우리말 이야기]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들꽃 호아저씨 2019. 10. 31. 18:06

 

 

첫째 권 『건방진 우리말 달인』, 둘째 권 『더 건방진 우리말 달인』, 셋째 권 『나도 우리말 달인』은 어느 신문사 교열부 기자 엄민용이 쓴 책이다. 지금까지 우리말과 글을 주제로 쓴 책들이 참 많은데 이 책은 그동안 나온 책들과는 달리 ‘어떤 딱딱한 틀’을 깨고 참 쉽고 재미있게 썼다. 한동안 ‘건우달’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도 했을 만큼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나도 이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배운 것도 많다.

탈이 난 건 셋째 권에서다. 먼저 나온 두 권을 읽고는, 말하자면 전문가들이 늘 문제라는 생각을 했지만 셋째 권 『나도 우리말 달인』을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세 권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지시관형사를 복수로 쓰는 글 버릇과 ‘무엇을 무엇이라고 한다.’ 할 때 꼭 ‘부른다’를 쓰는 글 버릇이다. 글은 말하듯이 써야 한다. 이 간단한 이치를 전문가들은 애써 무시한다. 왜? 몸으로 일하면서 말을 먼저 배운 게 아니라 그만 너무 글에 파묻혀 살아왔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버릇으로 굳어졌고 아무리 그 잘못을 알려줘도 고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말과 글에서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삶→말→글’이 거꾸로 뒤집혀서 ‘글→말→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나온다. 과장한 말이 아니다. 이 뒤집힌 ‘글→말→삶’의 흐름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가르고 마침내 우리 사회를 계급으로 나눈다.

아버지가 옆집에서 연장을 빌려 와서 아들과 집수리를 마쳤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아버지가 “철수야, 이 연장들을 영희네 집에 가져다주고 오너라.” 이렇게 말을 하지 “철수야, 이들 연장을 영희네 집에 가져다주고 오너라.” 이렇게 말하는 법은 없다. 끝없이 나오는 “이들 문장에서 잘못된…….” 이 문장들이지 어떻게 이들 문장인가. 지시관형사에 ‘들’을 붙여 무겁게 하면 문장 전체가 무거워진다. 스스로든 남이 그러든 ‘우리말 전문가들’이 다 이렇게 쓴다. ‘무엇을 무엇으로 부른다.’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저 나무는 소나무야.” 이렇게 말하지. “저 나무는 소나무로 불러.”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부른다’는 “철수는 노래를 잘 부른다.” 하든지 “영희야, 선생님이 너 불러 오라셔.” 할 때 쓴다. 더 큰 문제는 국어사전이다. 움직씨 ‘부르다’를 찾아보면 맨 마지막에 ‘어떤 사물을 가리킬 때 쓴다.’ 하고는 예문까지 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이렇게. 사전에 낱말 수가 수십만이니 그 낱말에는 별별 뜻이 다 있다느니 하면서 자랑할 일이 아니다. 대표가 되는 뜻을 문장에서 제대로 살려 써야 한다. 하늘이라고 늘 파란가. 그래도 우리가 하늘을 말할 때는 파란 하늘을 대표로 내세우지 않는가. 하긴 청천(靑天) 해 놓고 푸른 하늘이라고 뜻풀이를 하는 사전인데 뭐, 말 다 했지.

우리가 신시를 연 작품으로, 최남선이 쓴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든다. “시 제목에서 말하는 ‘해’는 하늘에서 뜨고 지는 ‘해’ 아닌가.” “예끼, 이 사람아, 무식하기는. 바다 ‘해’도 몰라.” “그러면 '바다가 소년에게' 해야지, 그렇잖은가.” “아이고, 이 무식한 양반, 시가 뭔지도 모르면 잠자코 있지.” 글이란 무엇인가. 좋은 글, 감동을 주는 글이란 어떤 글인가. 그 맨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말이 되는 글을 쓰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