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의미 - 은수 5주기에 부쳐
은수야, 네가 떠난 지 1,825일.
아빠는 지금 단식중이다. 해마다 10월이면 너를 기리는 단식을 해왔지. 그때마다 고모들과 나는 마음 졸이면서 아빠를 지켜보았고.
열흘 전쯤인가, 아빠가 운영하는 티스토리 <호아저씨 들꽃 블로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백석의 시가 올라왔어. 너도 알거야. 전에도 아빠가 여러 번 블로그에 올린 시니까. 근데 이번엔 그 시의 후반부에 내 눈과 마음이 가서 콱 박히더라.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늘 영민하고 사려깊고 심지 깊은 너를 자랑스러워했다. 어쩌면 아빠는 단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슬픔과 한탄과 외로움의 극단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와도 같은 너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빠에게 단식은 단순히 애도 차원에서 식(食)을 끊는 것이 아니었던 거지.
너도 알다시피 밥은 우리의 일상이지. 그걸 끊는다는 건 일상을 끊는다는 거고.
아빠는 일상을 단절하고 비일상을 끌어들여 산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못보던 것을 보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너의 의미’를 새롭게 되살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는 알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보름 가까운 단식은 너무 무리야.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는 더더욱.
은수가 아빠에게 얘기 좀 해주면 안될까.
"아빠의 그 뜻 잘 알아요.
그러니까 제발 아빠,
이번을 끝으로 더이상 단식은 하지 마세요
제발이요..ㅠㅠ"
https://www.youtube.com/watch?v=4l5Ef8hMX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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