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소녀 김언경 님의 글

들꽃 호아저씨 2023. 10. 23. 20:43

 

 

저는 진주 엄마입니다. 호아저씨가 호아저씨인 것처럼 저는 소녀라는 별명으로 불리지요.

 

은수와 진주는 초등 1부터 중1까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습니다. 반은 이리저리 바뀌었지만 한 학년에 고작 두 반, 그것도 적은 수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같은 학년 부모들은 종종 만나고, 모꼬지도 가고, 이런저런 소모임으로 소통할 기회가 많지만 저는 은수 엄마와는 사적으로 거의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일한답시고 바빠서 학교 모임에 자주 못 갔지만, 은수 엄마도 저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호아저씨와는 좀 달랐습니다. 호아저씨는 한때 학교 도서관 사서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셨기에 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의할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진주와 은수가 5~6학년 때 제가 아이들과 '신문 반' 방과 후 선생님을 맡아 아이들과 마을신문을 만들었는데, 그때 호아저씨는 '맞춤법 관련 칼럼'을 고정적으로 써주셨습니다.

 

진주가 중1 이후 학교를 떠나서 저는 이후 은수와 호아저씨를 본 적이 없습니다. 5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은수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따질 자격은 없지만, 저 자신은 분명 잘못했다는 것을요. 제가 은수와 함께 했던 2년가량의 ‘신문 반’ 활동, 일주일에 두 시간은 짧다면 짧지만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분명 은수의 어려움을 봤습니다. 은수가 6학년일 때,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1초 만에 튕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은수가 이상하게 느릿느릿 가방을 싸고 또 싸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씁쓸한 표정, 깊은 한숨을 쉬며 답답하다는 듯, 원망에 찬 눈으로 저를 직시하던 은수가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 나는 뭔가를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은수를 챙기고, 학부모들과 학교에도 은수의 상황을 공유하고 아이들의 관계 문제에 섬세하고 분명하게 개입했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그날 은수에게 “너 무슨 일 있구나. 너 힘들구나. 너 화났구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그것을 들여다봐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은수야 가자 가자~”라며 서둘러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참 많은 일을 겪습니다. 은수와 진주네 학년도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멀리서 보면 참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지만, 그 안에서 치열하게 눈치 보며 싸우기도 했고 배척하기도 했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적은 수의 아이들이 쭉 한 학교에 다니면서 자라면, 관계의 문제가 발생할 때 숨을 곳이 없습니다. 변명 같지만, 모든 아이가 저마다의 어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수는 그 속에서 더 많이 어려웠습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은수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중1 환경도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 잘못입니다. 학교와 학부모가 은수뿐 아니라 아이들이 겪는 여러 관계의 문제에 보다 관심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관심이 아니라 아주 절실하게 이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성찰하고 대책을 세우고 실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주에게 친구들과 골고루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는 우격다짐을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도 뭔가를 했겠지만, 아이들 관계는 늘 삐거덕거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겠지 하며 당장 큰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걸로 또 하루를 보내곤 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아픔으로 곪아가는데 우리 어른들이 그걸 몰랐거나, 알면서도 외면했거나, 무능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수가 떠난 뒤, 저는 “은수가 죽기 전에 은수의 고통이 이 정도인지 우리가 알았더라면” 라며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라도, 은수가 떠났을 때라도 뭔가 제대로 하면 그건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최소한 은수 엄마와 호아저씨는 보내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은수 엄마를 만나러 갔는데,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은수 엄마는 은수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저에게 쏟아낼 그 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 그 분노를 꺼내 폭발하고 나면 너무나 힘이 들어서 쓰러져 버리는 은수 엄마였기 때문입니다. 호아저씨는 저에게 은수 엄마를 이해해달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이해하지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후에도 거듭거듭 은수 엄마를 다시 찾아갔어야 했습니다. 두려웠지만 그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또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저는 더 많이 바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호아저씨 있는 곳 근처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뭐에 홀린 듯 호아저씨에게 갔습니다. 그때 은수 엄마는 호아저씨를 원망하며 그를 떠난 상태였고, 호아저씨는 은수를 추모하며 블로그를 운영하고 향초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호아저씨는 두 시간 넘게 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많이 울었고, 호아저씨는 그나마 이렇게 와서 사과하고 이야기해 주어 고맙다고 했습니다.

 

이후 은수 엄마가 은수를 따라 떠났습니다. 호아저씨는 더욱 깊은 고통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죽는 것보다 살아 내는 것이 더 힘든 일임이 분명했습니다. 창고 안에 자신을 가두고 햇빛을 보지 않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운동을 안 했고, 삶의 모든 즐거움과 자신을 단절했습니다.

 

지난 해 9월 그가 존엄사를 하겠다며 곡기를 끊었을 때, 저는 그를 만류하러 갔었습니다. 자리에 누워있다가 저를 만나러 느릿느릿 들어오는 호아저씨를 보는데 정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저를 만나면 아무리 힘들어도 늘 배시시 웃어주셨던 분인데, 이번에는 저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습니다. 먹지도 씻지도 않고 그저 죽겠다는 입장만 보여주는 표정.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 영혼이 모두 빠져나간 그런 표정이었어요. 뭐라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힘들어요?”라고 말했는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저는 호아저씨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마저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우리 사회의 왕따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왕따를 막아내기 위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함께 해나가겠다고 했고, 그를 위해 같이 책 읽기 모임이 되든, 글쓰기 모임이 되든, 밥 먹기 모임이 되든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또 내 삶에 빠져서 그걸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은수 5주기가 다가오자 호아저씨에게 연락했습니다. 5주기 날 만나자, 다음날 지인 몇 명을 데리고 같이 갈 테니 식사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밤, 저는 곧 만날 거라는 생각에 다른 날과 달리 나름 다정하게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 말을 쓸 때 진심으로 호아저씨가 편안한 잠을 주무시고 내일을 맞길 바랐습니다. 호아저씨는 제 인사에 답을 안 보내더니 그 새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호아저씨를 가장 많이 돌봐주셨던 지인 하루마음은 호아저씨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호아저씨는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마음이 무른 사람, 고운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벌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호아저씨는 작년 은수 기일에 저에게 전화를 해서 가족끼리 하는 은수 추모제에 저와 진주를 공식적으로 초대하겠다고 했어요. 그날 호아저씨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진주 어머니와 진주가 오면 다 온 거라고 생각해요. 다 온 거예요. 그리곤 은수에게 “은수야 미안하다 아빠는 여기서 조금 더 살다가 갈게”라고 말했죠. 왜 우리를 그렇게 여기실까 송구하고 의아했는데 커피를 마시며 말하더군요. 호아저씨가 하는 블로그가 Daum에서 Tistory로 옮겼을 때, 바로 알고 알아서 찾아가겠다 하고 그렇게 빨리 찾아와준 게 저라는 겁니다. 진주는 호아저씨가 명절을 가장 힘들어하는데 그때 블로그를 찾아와서 명절 인사를 해줬다고 하더군요. 고작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마음을 풀고 마음을 주고 힘을 내주었던 사람입니다.

 

호아저씨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그의 유골 앞에 호아저씨를 닮은 소박한 개다리소반에 막걸리와 파전이 놓인 미니어처를 넣어드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호아저씨와 술 한 잔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게으름, 저의 무기력, 말만 하고,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한 저의 모든 것에 화가 납니다. 호아저씨를 잃은 저에게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도 은수와 은수 엄마와 만나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셨다고 그렇게 억지로 생각합니다.

 

호아저씨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은수에게 미안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전주곡 열Preludes, Op. 23

No. 1 in F-sharp minor: Largo

No. 2 in B-flat major: Maestoso

No. 3 in D minor: Tempo di menuetto

No. 4 in D major: Andante cantabile

No. 5 in G minor: Alla marcia

No. 6 in E-flat major: Andante

No. 7 in C minor: Allegro

No. 8 in A-flat major: Allegro vivace

No. 9 in E-flat minor: Presto

No. 10 in G-flat major: Largo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피아노

Venue: Human Rights Chamber at Palais des Nations. United Nations (Geneva, Switzerland) Broadcast date:Thursday, December 23, 2021 4:00 AM(KST)

https://www.youtube.com/watch?v=awcsPUTyo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