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분은 삭힐 수 없다
화를 드러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타인에게 공격성을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속으로만 끙끙 앓다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한다.
“분을 삭히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시다 건강이 안 좋아졌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꾹 누르고 속으로 삭히다 보니 화병이 났다”와 같은 사연을 접할 때가 많다. 여기서 ‘삭히다’는 올바르지 못한 표현이다. “분을 삭이기 위해” “속으로 삭이다 보니”로 바꿔야 한다.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은 ‘삭다’가 ‘삭히다’와 ‘삭이다’ 두 가지 형태의 사동사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사동사란 문장의 주체가 자기 스스로 행하지 않고 남에게 그 행동이나 동작을 하게 함을 나타내는 동사를 말한다.
‘삭히다’는 김치나 젓갈 따위의 음식물을 발효시켜 맛이 들게 하다는 의미의 사동사다. “가자미식해는 가자미를 삭혀 만든 함경도 지방의 젓갈이다” “코를 알싸하게 만드는 삭힌 홍어는 특유의 향으로 인해 호불호가 갈린다”처럼 쓰인다. 젓갈 등을 오래되도록 푹 삭히다고 할 때도 ‘곰삭히다’를 사용한다. ‘곰삭이다’란 말은 없다.
‘삭이다’는 어떤 감정이나 생리작용이 수그러들게 하다는 뜻의 사동사다. “화를 삭이려 무던히 애썼다” “생강차는 기침을 삭이는 데 좋다”와 같이 쓰인다. 긴장·화를 풀어 마음을 가라앉히다, 기침·가래 등을 잠잠하게 하다고 할 경우엔 모두 ‘삭이다’로 표현한다.
먹은 음식물을 소화시키다고 할 때도 ‘삭이다’를 쓴다. “돌도 삭일 나이라더니 정말 잘 먹는구나”처럼 사용한다.
이은희 기자 lee.eunhee@jtbc.co.kr
삭-이다2 「동사」
【…을】
「1」 먹은 음식물을 소화하다. ‘삭다’의 사동사.
⸱돌도 삭일 나이에 그렇게 소화를 못 시켜서 어떻게 하냐.
「2」 긴장이나 화를 풀어 마음을 가라앉히다. ‘삭다’의 사동사.
⸱분을 삭이다.
⸱흥선의 집을 찾았던 병기는, 거기서 나올 때는 그 불쾌한 기분을 다 삭였다.≪김동인, 운현궁의 봄≫
「3」 기침이나 가래 따위를 잠잠하게 하거나 가라앉히다. ‘삭다’의 사동사.
⸱생강차는 기침을 삭이는 데 좋다.
⸱깡마른 계집애의 저 가는 목에 그렁거리는 가래를 삭여 주소서.≪이정환, 샛강≫
삭-히다 「동사」
【…을】
김치나 젓갈 따위의 음식물을 발효시켜 맛이 들게 하다. ‘삭다’의 사동사.
⸱밥을 삭혀 끓인 감주.
⸱김치를 삭히다.
⸱멸치젓을 삭히다.
⸱민속주는 곡식을 삭혀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삭다 「동사」
「1」 물건이 오래되어 본바탕이 변하여 썩은 것처럼 되다.
⸱삭은 나무토막.
⸱옷감이 삭다.
⸱밧줄이 삭아 끊어졌다.
⸱시체는 근육만 부패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근육과 더불어 옷까지도 함께 삭아 있었다.≪홍성원, 육이오≫
「2」 걸쭉하고 빡빡하던 것이 묽어지다.
⸱죽이 삭다.
⸱고추장이 삭다.
「3」 김치나 젓갈 따위의 음식물이 발효되어 맛이 들다.
⸱젓갈이 삭다.
⸱엿기름물에 만 밥이 삭아서 밥알이 뜨면 솥에 넣고 끓였다 식혀서 식혜를 만든다.
「4」 먹은 음식물이 소화되다.
⸱밥이 삭다.
⸱오전 내내 가만있으니 아침 먹은 것도 삭지 않은 것 같다.
「5」 긴장이나 화가 풀려 마음이 가라앉다.
⸱분이 삭다.
⸱온갖 서글픔도 가라앉고 그리움도 한스러움도 삭아 버린 하얀 앙금 같은 것이 고여 왔다.≪한수산, 부초≫
「6」 불이 사그라져서 재가 되다. =사위다.
⸱모닥불이 삭다.
「7」 사람의 얼굴이나 몸이 생기를 잃다.
⸱며칠 앓더니 몸이 많이 삭았구나.
⸱그의 얼굴이 삭은 걸 보니 고생이 많은가 보다.
「8」 기침이나 가래 따위가 잠잠해지거나 가라앉다.
⸱약을 먹었는데도 기침이 삭질 않는다.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