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원기자의 바른말 광] 임대/임차
'육군, 러시아 훈련장 임대 검토' 지난 토요일 어느 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우리 육군이 러시아에 훈련장을 빌려주다니, 러시아라면 그래도 미국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던 세계적인 군사대국이었는데, 우리 군도 이제 시설이 많이 나아졌나 보군,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기사였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본 기사 본문은 내용이 달랐다.
첫 문장이 '육군이 러시아군의 훈련장을 임대해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며 약간 이상하게 시작되더니, 결론은 우리 군이 러시아군의 훈련장을 빌려 쓸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본문과 제목에 나온 '임대'(賃貸·빌려줌)는 '임차'(賃借·빌려 씀, 세 냄)를 잘못 쓴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실수는 기사를 쓴 취재기자, 취재부서 부장, 기사를 편집한 편집기자, 편집부장, 본문을 챙긴 교열기자, 교열부장, 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등 적어도 여덟아홉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어야 일어난다.
그래서 지난 시절, '대통령'이 '대령통'이나 '대령'으로 나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신문들은 '불가항력'이라거나 '귀신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한자말 좋아하는 고질병이 일으킨 실수라고 볼 수도 있다.
'빌려주다/빌려 쓰다'라고 하면 전혀 헷갈릴 일이 없는 것을, 굳이 한자말 '임대하다/임차하다'로 써서 일어난 실수인 것이다.
사실 한자세대라면 말뜻을 정확히 알고 있으므로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문제작 주도층이 한자세대에서 한글세대로 변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실수라고도 할 수 있을까? 이 신문은 이틀 뒤 '임대'를 '임차'로 바로잡는다고 밝혔지만, 이미 기록은 남아버렸다.
2005/03/08 부산일보
새 우리말 바루기 53. 임대/임차
친구끼리는 될 수 있으면 돈 거래를 하지 말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잘못하면 금전도 잃고, 우정도 잃는다는 것이다. 사실 친한 사람끼리 거래를 하다 보면 절차를 소홀히 하기 쉽고, 그것이 빌미가 돼 사이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므로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영수증, 차용증 등을 제대로 갖춰 거래하는 것이 좋다.
서류 작성 때 용어를 정확하게 쓰지 않으면 후에 분쟁이 생길 수 있다. 거래와 관련해 우리가 흔히 잘못 사용하는 것이 `임대`라는 단어다. 임대(賃貸)는 `돈을 받고 자기의 물건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 상황에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다음 예를 보자. "도예가 부부인 박씨와 황씨가 비엔날레 재단으로부터 임대해 운영하고 있는 카페 `빈`은 클럽전의 출품작들을 실내장식 소품으로 활용했다." "대한체육회 등은 그동안 조정과 카누 경기를 치르기 위해 한강 미사리경기장이나 부산 낙동강경기장을 임대해 사용할 것을 검토했다." "이 회사는 영업활동 정지 등은 사실이 아니며 원가 절감 차원에서 오릭스로부터 임대했던 계측기를 반납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들 예문은 문맥을 볼 때 모두 건물, 경기장, 기계 등을 자신이 `빌린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는 뜻인 `임대`를 사용하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세 예문 모두 `임차(賃借)`로 써야 한다. `임차`는 `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쓰는 것`이다.
2004/09/14 중앙일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임대료'를 어찌 '체납'하나요?
'임대료'는 빌려준 대가로 받는 돈이고, '임차료'는 빌린 대가로 주는 돈이다. 그러니 "임대료를 체납했다"란 표현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임차료를 체납했다"라고 해야 한다.
“SK바이오, 미 노바백스 백신 ‘위탁생산’…전 세계에 공급” “인텔이 반도체 ‘위탁생산’으로 돌파구 찾는다” “르노삼성차는 2020년 닛산의 로그 ‘위탁생산’이 종료되면서 일감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위탁/수탁’은 분명히 구별되는 말이다. 위탁은 남에게 무언가를 맡기는 것이다. 반대로 수탁은 남한테서 무언가를 맡는 것이다. 예문에서는 모두 ‘위탁생산’이라고 했으니 각각의 문장 주어가 남한테 생산을 맡겼다는 뜻이어야 정상적인 어법이다.
‘임대료’는 주인의 용어…빌린 쪽에선 ‘임차료’
그런데 가만 보면 그런 뜻으로 쓴 게 아니다. 실제로는 SK바이오가 노바백스의 백신 생산을 맡은 것이다. 인텔이 반도체 생산을 남한테 맡기는 게 아니라 맡는다는 뜻이고, 르노삼성차가 닛산의 로그 생산을 맡았다는 얘기다. 그러니 모두 ‘위탁생산’이 아니라 ‘수탁생산’인 셈이다. 위탁생산과 수탁생산의 차이를 개념상으로는 알고 있을지 몰라도 막상 실생활이나 현업에서 쓰다 보면 마구 뒤섞이는 것 같다. 요즘 우리말에는 이처럼 본래의 용법을 잃어버린 채 엉뚱하게 쓰는 말들이 꽤 있다. 이른바 ‘방황하는 말’들이다. 단어의 변별성을 잘 살려 써야 논리적이고 합리적, 과학적 글쓰기가 이뤄진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임대/임차’도 단어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말 중 하나다. ‘임대(빌려줌)’와 ‘임차(빌려 씀)’는 명백히 다른 말인데도 이를 두루 ‘임대’로 쓰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구의 말인가’를 생각하고 써야 한다. ‘임대’는 주인의 용어이고, ‘임차’는 빌리는 사람을 주체로 한다. “인근 빌딩 1층 상가 유리창에 ‘임대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런 데 쓰인 ‘임대인(빌려주는 사람)’은 생뚱맞다. ‘임차인(빌려 쓰는 사람)’을 잘못 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임대료’는 빌려준 대가로 받는 돈이고, ‘임차료’는 빌린 대가로 주는 돈이다. 그러니 “임대료를 체납했다”란 표현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임차료를 체납했다”라고 해야 한다. 동네 상가의 점포 유리창에 붙어 있는 ‘임대 문의’ 같은 안내문도 본말이 전도됐다. 임차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므로 ‘임차 문의’라고 해야 앞뒤가 맞다.
지명한 사람, 지명받은 사람 모두 ‘지명자’ 모순
언론에서 쓰는 말 가운데 ‘지명자’도 고약하긴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장관 등 중요 인사 후보자를 내정할 때 나오는 용어다. 우리 언어인식에서 지명자라고 하면 말 그대로 ‘지명하는 사람(nominator)’이다. 영어에서는 ‘지명자(nominator)-피지명자(nominee)’가 확실히 구별된다. 하지만 요즘 우리말에선 이를 엄격하게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사전에서조차 지명자를 ‘이름을 지정하여 가리키는 자. 또는 그렇게 지명을 받은 자’로 양쪽 다 쓸 수 있게 해 놨다. 그러니 대통령이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했는데, 대통령도 지명자고 후보자도 지명자가 되는 기막힌 상황인 셈이다. 접두사 ‘피(被)-’가 있지만, 한자 의식이 흐려지면서 일부 말을 제외하곤 현실언어에서 활발하게 쓰이지 않는다. ‘지배자-피지배자’ ‘정복자-피정복자’ ‘보험자-피보험자’ 등 그나마 쓰이는 말이 얼마 되지 않는다.
추천자-피추천자, 포상자-피포상자, 초청자-피초청자 등이 다 구별되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두루뭉술하게 쓰인다. 요즘 상속인과 피상속인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 상속인, 사망 등으로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이 피상속인이다. 말은 분명한데, 쓰는 이가 이를 모호하게, 뒤섞어 써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