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 키릴 페트렌코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류시화, 수오서재, 2022)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 교향곡 5번Symphony No. 5 in E minor, Op. 64 written in 1888 I. Andante – Allegro con anima II. Andante cantabile, con alcuna licen..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 사이먼 래틀 - 봄의 설법 : 이동순

봄의 설법 / 이동순 ​ 경칩 지나서 며칠 뒤 지훈과 밀양 표충사 재약산 사자평을 한달음박질로 뛰어내려와서 계곡 바위에 앉아 헉헉 가쁜 숨 돌릴 즈음 올해의 첫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나는 작은 짐승처럼 귀 쫑긋 세우고 대지에 울려퍼지는 잔잔한 봄의 설법에 귀기울였다 그날 개구리가 무슨 설법을 했는지는 여기에 세세히 쓰지 않겠다 ​ -시집 『봄의 설법』(이동순, 창작과비평사, 1995)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winsky(1882-1971)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947년 개정판) 1부 대지의 찬양Part 1: L’adoration de la terre (Die Anbetung der Erde) 1.서곡Introduction (Einführung) 2.봄의 싹틈과..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4번 :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 순례(巡禮)의 서(書) : 오규원​

순례(巡禮)의 서(書) / 오규원​ ​ 1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偏愛)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2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옷자락은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은 그리고 무엇인가 단 한마디의 말로 나를 영원히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 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번, 라흐마니노프 코렐리 주제 변주곡, 쇼팽 발라드 4번, 차이콥스키 소품 열여덟에서 5번 ‘명상’, 프로코피예프 피아노소나타 7번 : 데니스 마추예프 - 아시는지 : 최..

아시는지 / 최승자 ​ 아시는지? 어느 날 갑자기 라면 먹고 싶은 것, 살고 싶음의 뿌리 그리하여 살아 있음의 뿌리 되찾고 싶은 것. ​ 그래, 어느 날인가 몇 명의 문인이 라면이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다만, ​ 오 들끓는 식욕으로 다가오는 라면, 고통과 쾌락의 두 약재로 빚어진 우리 시대의 당의정을 아시는지? ​ 불현듯 식욕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언가 골수에 사무친 것이다. 저 충청도 산간의 시래기 국을 못 잊듯, 저 도시 변두리의 라면을 못 잊듯. -『기억의 집』(최승자, 문학과지성사, 1989)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번Piano Sonata No. 3 in C major, Op. 2, No. 3 I. Alle..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16번, 14번, 환상곡 4번,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7번,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박목월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박목월 ​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라모 클라브생 모음곡 G장조,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16번, 브람스 피아노소나타 1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시집 『별똥별』(김종해, 문학세계사, 1994) 장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1683-1764) 클라브생 모음곡 G장조Suite in G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16번Piano Sonata No. 16 in G major, Op...

바흐 이탈리아협주곡, 차이콥스키 ‘사계’, 쇼팽 스케르초 넷 : 랑랑 - 우화(偶話)의 강(江) 1 : 마종기

우화(偶話)의 강(江) 1 / 마종기​ ​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를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 처음 열린 물결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 시집 『국수가 먹고 싶다』(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 I. Maestoso-Alleg..

베토벤 교향곡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9번 : 사이먼 래틀 - 봄 : 이정훈

봄 / 이정훈 하루 식전엔 누가 대문 밖을 서성거리기에 문 빼꼼 열고 봤더니 그 눈치 없는 것, 봉두난발에 흙발로 샐쭉 깡통 내밀데요 언제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지 흰쌀에 노랑 조, 분홍 수수, 자주 팥 없는 것이 없는데 그냥 보내기 뭣해서 보리 싹 한줌 얹어주었지요 고것이 인사도 없이 뒤꿈치를 튀기며 가는데 멀어질수록 들판은 무거워지고 하늘은 둥둥 가벼워지고 먼 개울가에선 버들강아지 눈 틔우는 소리 들려왔어요 참 염치도 없지, 몽당숟갈 하나 들고 따라가고 싶더라니까요 -『쏘가리, 호랑이』(이정훈, 창비, 2020)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레오노레 서곡 1번Leonoren-Ouvertüre Nr. 1 in C-Dur, Op. 138 루트비히 판 베토벤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