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 사이먼 래틀, 에사-페카 살로넨 - 봄의 소식(消息) : 신동엽

봄의 소식(消息) / 신동엽 ​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와서 몸 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 『창작과비평』제16호(19..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5번 ‘봄’, 9번 ‘크로이처’ :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 - 『사랑의 물리학』(김인육, 문학세계사, 2016)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바이올린소나타 5번 '봄'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 5 in F Major, Op. 24 "Spring" Ⅰ. Allegro Ⅱ. Adagio molto espressivo Ⅲ. Scherzo: Allegro molto Ⅳ...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잔,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14번, 론도, 베토벤 첼로소나타 2번 : 솔 가베타, 크리스티안 베주이덴호우트 - 혹등고래의 노래 : 김해자

혹등고래의 노래 / 김해자 나는 혹등고래 새끼 하나 데리고 난바다를 건너간다 물에 먹혀 물이 되어버린 소리를 느끼기 위해선 같은 깊이로 내려가 오래 엎드려야 한다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기 위해선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움직이지 않는 섬이 되어야 한다 소리를 막 통과하기 위해선 몇 겹 주름을 지나가야 하고 울음에 화답하기 위해선 소리회랑에 몸을 기울여야 한다 삶은 혹, 머잖아 네 등에도 파래와 따개비와 고기들이 잔뜩 실릴 게다 맵짠 노래가 울음이자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꼬물거리는 이 모든 것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자 꼬리와 지느러미로 바닥을 치며 영원 같은 하루치의 생 ​ ​-『집에 가자』(김해자, 삶창, 2015)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별 : 이병률

별 / 이병률 ​ 면아 네 잘못을 용서하기로 했다 ​ 어느 날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닌 잘못 보내진 메시지 ​ 누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데 한낮에 장작불 타듯 저녁 하늘이 번지더니 왜 내 마음에 별이 돋는가 왈칵 한 가슴이 한 가슴을 끌어안는 용서를 훔쳐보다가 왈칵 한 가슴이 한 가슴을 후려치는 불꽃을 지켜보다가 눈가가 다 뜨거워진다 ​ 이게 아닌데 소식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어찌할까 망설이다 발신번호로 문자를 보낸다 ​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 이번엔 제대로 보냈을까 아니면 이전의 심장으로 싸늘히 되돌아가 용서를 거두고 있진 않을 것인가 ​ 별이 쏟아낸 불똥을 치우느라 뜨거워진 눈가를 문지르다 창자 속으로 무섭게 흘러가는 고요에게 묻는다 정녕 나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4번, 13번, 차이콥스키 ‘사계’ 피아노를 위한 12가지 독특한 그림 : 미하일 플레트네프 - 누군가의 그 말 : 천양희

누군가의 그 말 / 천양희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두근 두근 합해서 네근이랍니다 여러분을 만나러 오는 내 마음이 그랬습니다 누군가의 그 말이 내 심장을 쳤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만날 때 나도 그 말 꼭 빌려 써야겠습니다 덜 소유하고 많이 존재하라던 당신 덕분에 세상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누군가의 그 말이 내 심장을 쳤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만날 때 나도 그 말 꼭 빌려 써야겠습니다 미움과 갈등을 용서와 화해로 바꾸는 것은 미안합니다라는 단 한마디라고 합니다 누군가의 그 말이 내 심장을 쳤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만날 때 나도 그 말 꼭 빌려 써야겠습니다 누군가의 그 말 때문에 나는 오늘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압니다 나는 이 세상에 심장이 두근 두근 살아가도록 태어났습니다 -『누구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2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알렉산드르 라자레프 - 바람 부는 날 : 신경림

바람 부는 날 / 신경림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난다 광산촌 외진 정거장 가까운 대포집 손 없는 술청 연탄 난로 위에 끓어넘는 틀국수 냄새가 난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기차바퀴 소리가 들린다 갯비린내 싣고 소금밭을 지나는 주을이라 군자의 협궤차 소리가 들린다 황새기젓 이고 새벽장 보러 가는 아낙네들의 북도 사투리가 들린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갈대밭이 보인다 암컷 수컷 아우러져 갈갬질하는 개개비가 보이고 물총새가 보인다 강가 깊드리에서 나래질하는 옛날의 내 동무들이 보인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꿈을 꾼다 버들고리에 체나 한 짐씩 덩그머니 지고 그 옛날의 무자리되어 길떠나는 꿈을 가세가세 흥얼대며 길떠나는 꿈을 ​ -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실천문학사..

슈베르트 즉흥곡 넷 D. 899, 피아노 소품 셋,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산수유꽃 : 박형준

산수유꽃 / 박형준 ​ 논둑에 앉아 산수유를 바라봅니다 얕은 구릉에 무리져 핀 산수유가 논바닥 웅덩이에 비칩니다 빛이 꽃 그림자에서 피어납니다 저쪽에서부터 농부가 황소를 몰고 생땅을 갈아엎고 있습니다 논바닥 웅덩이가 흔들립니다 땅에서 향내가 솟구칩니다 소발굽에서 물집 잡힌 저 산수유꽃 그늘 이런 아침에 당신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산간마을의 봄빛이 저만큼 깊습니다 ​ -『춤』(박형준, 창비, 2005) Grigory Sokolov plays Schubert, Beethoven, Rameau, and Brahms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즉흥곡 1번Impromptu 1 in C minor Op. 90, D. 899 즉흥곡 2번Impromptus Nr. 2 in E fl..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꽃의 이유 : 마종기

꽃의 이유/ 마종기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그 나라 하늘빛』(마종기, 문학과지성사, 2000)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 I. Maestoso-Allegro con brio ed appassionato II. Arietta-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피아노 https://w..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 키릴 페트렌코 - 봄비 : 고미경

봄비 / 고미경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 봄비가 오네 ​ 목을 빼고 기다렸던 ​ 야윈 나무 ​ 끝내는 ​ 눈시울 뜨거워져 ​ 몸마다 붉은 말들 웅얼웅얼 터지네 ​ 한나절이 지나도록 ​ 포옹을 풀지 못하고 ​ 적시고 ​ 스미고 ​ 천천히 깊어지네 ​ 간이역 하나 ​ 그대에게 와 닿네 -『칸트의 우산』(고미경, 현대시학, 2015)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1839–1881)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1874) (orchestrated by Maurice Ravel) I. 프롬나드Promenade II. ‘난장이Gnomus III. Promenade IV. 옛 성Il vecchio castello V. Promenade VI. 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