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브람스 교향곡 1번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투간 소키에프 - 다시 가을 : 도종환

다시 가을 / 도종환 ​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 도종환,『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로그인만 하면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교향곡 1번Symphony No. 1 in C Major, Op. 21 I. Adagio molto - ..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16번, 14번, 환상곡 4번,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7번,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변방의 길 휘어진 저쪽 물끄러미 바라보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텅 빈 방처럼 후드득 묻어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에 울컥 눈물나는 가을 ​ 덥수룩한 웃음을 지닌 산도적 같은 사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혹시 ..

슈베르트 즉흥곡 넷 D. 899, 피아노 소품 셋,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여름날 : 허형만

여름날 / 허형만 - 성모 마리아 ​ 제가 당신의 그림자 끝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꿈꿀 수 있음은 먼길 부르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천둥 치고 벼락 치는 그토록 긴긴 세월 속에서도 푸른 바람과 넉넉한 기쁨으로 이 여름을 지탱할 수 있음은 제가 당신의 서러움까지도 고이 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당신 가까이에 있고 당신은 저로부터 멀리 계시나 눈빛만으로도 손길만으로도 눈물겨운 사랑을 전할 수 있음은 참으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비 잠시 그친 뒤』(허형만, 문학과지성사, 1999) Grigory Sokolov plays Schubert, Beethoven, Rameau, and Brahms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즉흥곡 1번Impromptu 1 i..

바흐 파르티타 1번,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7번,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14번, 악흥의 순간 여섯 : 그리고리 소콜로프 - 환절기 : 도종환

환절기 / 도종환 여름은 가을로 아프게 넘어갔다 여름이 너무 길고 격렬해 올가을엔 단풍이 늦어지겠지만 기온이 낮아질수록 단풍은 곱게 물든다고 했다 여름은 가을로 스산하게 넘어갔다 일교차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커 낡은 외투의 깃을 자꾸 끌어올려야 했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은 옛 술집 근처로 모였다 새로 닦아놓은 길은 황폐해지고 실망한 나무들은 일찍 잎을 버려서 이슬이 내리기도 전에 마을은 눅눅하였다 여름은 가을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구름도 흑백사진의 한 귀퉁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어이없이 쫓겨난 채 집의 허울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도 전기도 수돗물도 끊긴 가을은 왔고 탐욕이라고 불러도 좋고 환멸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폭력적인 한 시대가 긴 그림자로 골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팔 한 짝을 잃어버린 옷소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 브람스 피아노소나타 1번, 리스트/슈베르트 가곡(피아노 편곡),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1946-1994)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살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프랑크 전주곡, 푸가와 변주곡, 라벨 소나티네, 탈베르크 벨리니 ‘라 손남불라’(몽유병의 여인) 그랜드 카프리스, 슈만 환상소곡집, 리스트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왈.. - 인연이..

세자르 프랑크César Franck (1822-1890) 전주곡, 푸가와 변주곡Prélude, Fugue et Variation Op. 18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소나티네Sonatine 지기스문트 탈베르크Sigismund Thalberg (1812-1871) 벨리니 ‘라 손남불라’(몽유병의 여인) 그랜드 카프리스Grand caprice on Bellini's La Sonnambula Op. 46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 환상소곡집Fantasiestücke Op. 12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왈츠를 피아노로 편곡Paraphrase on a Waltz from Gounod'..

하이든 피아노소나타 32번, 47번, 49번, 슈베르트 즉흥곡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 『그 여름의 끝』(이성복, 문학과지성사, 1990)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 피아노소나타 32번Sonate (Divertimento) Nr. 32 op. 53 Nr. 4 g-Moll Hob.XVI:44 피아노소나타 47번Sonate (Divert..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바흐/켐프 '시칠리아노', 바흐/헤스 칸타타 ‘예수는 나의 기쁨이시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1번, 슈베르트 ‘독일 춤 열여섯’, 슈만 ‘카니발’ : 예카테리나 메체티..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김용택 ​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 - 『그 여자네 집』(김용택, 창비..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안네 소피 무터 - 비 잠시 그친 뒤 : 허형만

비 잠시 그친 뒤 / 허형만 한나절 퍼붓던 비 잠시 그치자 잠자리 무리지어 된장잠자리 노랑잠자리 날개띠잠자리 무리지어 날 수만 있다면 일곱 번이든 여덟 번이든 아픔의 껍질을 벗고 그리움의 속내도 벗고 훠이훠이 청산이 좋아라 잠자리 무리지어 한나절 퍼붓던 비 잠시 그친 뒤. -『비 잠시 그친 뒤』(허형만, 문학과지성사, 1999)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61 Ⅰ. Allegro ma non troppo Ⅱ. Larghetto Ⅲ. Rondo - Allegro 핀란드방송심포니오케스트라Finnish Radio Symphony Orchestra 아우구스틴 하델리히Augustin Hadelich..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 백석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 백석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