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 발레리 폴리안스키 -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강연호 ​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강연호, 문학동네, 2001)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

베토벤 교향곡 9번 : 알렉산드르 루딘 -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 1994)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 투간 소키에프 - 9월과 뜰 : 오규원

9월과 뜰 / 오규원 ​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오규원, 문학과지성사, 2005)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 교향곡 6번 ‘비극적’Symphonie Nr. 6 a-Moll "Tragische" I. Allegro energico, ma non troppo. Heftig, aber markig II. Andante moderato III. Scherzo. Wuchtig - (Trio) Altväterisch. Grazioso IV. Fi..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브람스 헝가리 춤곡 : 가브리엘 베베셀레아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인생각, 2013)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1786-1826) ‘무도회의 권유’"Invitation to Dance" (orchestrated by H. ..

[참고 영상]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1번, 2번, 3번, 4번, 5번 :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드미트리 쉬스킨, 알렉세이 볼로딘, 유자왕 - 봄여름가을겨울 : 이설야

봄여름가을겨울 / 이설야 ​ 봄여름가을겨울 다시 겨울 겨울은 손목이 가는 눈발 ​ 지난 겨울은 잘 있습니다 그때 내린 눈은 아직 다 녹지 못한 채 올해는 올해의 눈이 내립니다 ​ 우리는 흩뿌려진 눈처럼 몇년째 만나지 못했습니다 ​ 눈송이들은 눈송이들과 함께 흩어지면서 하염없이 내립니다 내리는 눈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땅은 커다란 눈사람 하늘은 거대한 빙하 나는 보이지 않는 눈송이 ​ 밤 속에서 밤이 밤을 다시 얼리고 갑니다 ​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겨울 겨울은 봄을 만듭니다 봄은 나비를 만들고 ​ 일년 내내 슬픔은 슬픔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 오늘은 오늘의 마음을 다 쓰겠습니다 ​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이설야, 창비, 2022)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가을 부근 : 정일근

가을 부근 / 정일근 ​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정일근,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시와시학사, 2001)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

하이든 피아노소나타 32번, 47번, 49번, 슈베르트 즉흥곡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가을이 왔다 : 오규원

가을이 왔다 / 오규원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 오규원,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 피아노소나타 32번Sonate (Divertimento) Nr. 32 op. 53 Nr. 4 g-Moll Hob.XVI:44 피아노소나타 47번Sonate (Divertimento) Nr. 47 op. 14 Nr...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1번, 8번 ‘비장’, 14번 ‘달빛’, 17번 ‘템페스트’ : 미하일 플레트네프 - 멀리서 빈다 : 나태주

멀리서 빈다 / 나태주 ​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시선집 (나태주, 시인생각, 2013)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1번Sonata No. 1 in F minor op. 2 No. 1 I Allegro II Adagio lll Menuetto and Trio Allegretto IV Prestissimo 피아노소나타 8번 ‘비장’Sonata No. 8 in C minor (Pathetique..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어느날, 가을 : 유승도

어느날, 가을 / 유승도 비가 그친 어느날, 계절이 바뀌었다 갈대꽃도 바람에 날리고 산도 가볍다 부풀고 펴져서 피어오르고 싶은 것들은 몸을 일으켜 하늘을 높이고, 자리에 들어 깊은 숨을 쉬고 싶은 것들은 땅을 향하여 고개 숙인다 이제 그만 단절하자 성장의 시기도 지났다 망설이는 사람아 보아라 결실의 벌판 아득히 가야할 길이 있다 철 지난 매미의 소리도 드높다 울어라 슬픔이 많은 자여 울어라 나는 배코를 하련다 푸르른 배코를 투명한 머리를 갖고 싶다 불현듯 다가온 이 가을 앞에서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유승도, 창비, 1999) 배코 : 상투를 앉히려고 머리털을 깎아 낸 자리 (출처: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전주곡 열Prelu..

브람스 교향곡 4번 : 카를로스 클라이버, 필립 헤레베헤 -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 박남준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 박남준 ​ 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