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사겼던 사람이 할켜?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경험이 없어 어렵고, 실수가 잦아서 어렵다.
부산에 '항도일보'라는 신문이 있었다. 1989년 창간됐는데 한때 자매지로 경제신문까지 발행하다가 폐간됐다. 한데, 이 신문 창간 초기에 1면 제목이 이렇게 나온 적 있다.
<낙동강하구 지형이 바꼈다>
물론 창간한 지 얼마 안 돼 어수선한 때문이었겠지만, 신문의 얼굴이라 할 1면에서 제목이 그만 엉터리로 나간 것이었다. '바른말 광' 독자라면 뭐가 잘못됐는지는 아실 터. 바로 '바꼈다'라는 서술어가 문제였다. '바뀌었다'라는 말은 더 줄일 수 없다. '바꼈다'로 쓰면 안 된다는 얘기다.
'-꼈-'을 분석하면 '끼+었'으로 나뉜다. 그러니 '베꼈다, 비꼈다'는 '베끼다, 비끼다'에 과거를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 '-었-'이 결합('베끼었다, 비끼었다')한 뒤 줄어든 꼴이다. 마찬가지로 '들켰다, 삼켰다, 시켰다'도 '들키다, 삼키다, 시키다'를 활용한 것. 이는 모두 한글 맞춤법 제36항('ㅣ' 뒤에 '-어'가 와서 'ㅕ'로 줄 적에는 준 대로 적는다)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귀-, -퀴-'에 '-었-'이 결합할 땐 더 줄일 수 없다. 즉 '사귀다, 지저귀다'는 선어말 어미와 결합하면 '사귀었다, 지저귀었다'로만 활용될 뿐, '사겼다, 지저겼다'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ㅟ' 다음에 '어'가 올 때 줄여 쓸 수 없다는 것.
사실이 그렇다. '나뉘었다, 뉘었다, 휘었다'를 대체 어떻게 더 줄일 것인가. 그런 까닭에 '바뀌었다'도 '바꼈다'로 줄이면 안 되는 것이다. '쥐었다'도 마찬가지. 이걸 잘못 줄여 '졌다'로 쓰면 말뜻이 확 바뀐다.
<실종·침수·결항·휴교…태풍 에위니아 전국 할켜>
어느 신문에 실린 제목인데, 여기 나온 '할켜' 역시 잘못이다. '할퀴다'도 '할퀴었다'로 쓸 뿐, 더 줄일 수는 없다.
여담인데, 태풍이 우리나라를 할퀴었다면 우리나라가 당한 그 상태를 어떻게 써야 할까. 할큄을 당했다? 할퀴어지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할퀴이다'라는 피동사가 있다. 하지만 생긴 지 얼마 안 돼 대개는 이런 말이 있는 걸 모른다. 그러니 <들판에 채소 뜨문뜨문/수해 할퀴인 상처 짐작> 같은 제목을 쓰는 신문이라면 믿어도 되겠다. 신문도 잘 골라 봐야 하는 요즘이다.
이진원 기자http://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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