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셋밖에 없다. 사이시옷 어렵다 하지 말고 현재진행과 대과거를 버려야 한다. 그 글이 산만하고 어지럽고 어렵다.
죽은 과거완료를 위한 파반느
“못생겼었다. 그러나 사랑했었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몇 달 전 읽었다. 이 소설은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를 통타하는 명작이었다. 읽는 내내 위트와 통찰이 넘치는 비유들과 독창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에 감탄했다. 작가에게 헌사를 바치고 싶다. 딱 하나만 빼고! 이 소설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못생겼었다. 그러나 사랑했었다”는 문장이 그걸 암시한다. “못생겼다. 그러나 사랑했다”고 하지 않고 굳이 동사어미 부분에 ‘었’을 집어넣었다. 이건 ‘엇박자’가 아니라 ‘었박자’다. 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이 칼럼에서 몇몇 소설에 관한 사소한 아쉬움을 토로했었다.(‘한 적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굳이 ‘했었다’라고 써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선 ‘그리고’의 과잉을 지적했고, 주원규의 <열외인종잔혹사>를 놓곤 ‘하지만’의 홍수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오늘 한 가지 더 추가로 고백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보는 동안 잇따라 나오는 과거완료식 표현들이 입 안의 생선가시처럼 걸렸다고. 소설가 박민규님껜 송구스럽지만, 이 소설의 또다른 제목을 <죽은 과거완료를 위한 파반느>라고 지어본다.
“정신없이 한 주가 지나갔었다.” “현실에선 세일과 세일이 이어졌었다.” “그만 멈칫하던 주부의 팔이 닿으면서 와르르 짐이 쏟아졌었다. 한 이십분 난리가 났었다.” “나는 생각했었다.” “나는 술래를 서듯 두 눈을 감았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열정과 파탄에 흠뻑 빠져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도,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리 과거완료가 많은 거야? “한 주가 지나갔다”고 하지, 왜 “한 주가 지나갔었다”라고 쓴 거지? “나는 생각했다”고 하면 쉬울 텐데, “나는 생각했었다”는 뭐지? 남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소설 속 추녀만큼, 그 과거완료들도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중딩 준석과 초딩 은서도 ‘었’중독이다. “내가 예전에 6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93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그 점수를 받았을 때는 생각보다 전혀 잘 나온 것 같지가 않아서 매우 실망했었는데.”(준석) “돌을 누가누가 더 멀리 던지냐 시합도 했었다.”(은서) ‘있었다’ ‘실망했었는데’ ‘했었다’에서 ‘었’을 뽑아본다. 더 자연스럽잖아?
고 이오덕 선생은 이에 관해 <우리글 바로쓰기>라는 책에서 일갈했다. “영어 공부를 한 사람들이 영어 문법을 따라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우리말엔 본래 과거완료가 없다. 좋으면 쓸 수 있다. 몇번을 읽어도 어감이 예쁘지 않아 문제다. “우리말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파괴한다”는 이오덕 선생의 비판에 동의한다.
1950년대 쓴 글에서도 과거완료를 만난다. 한국전쟁 때의 일기를 묶은 역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역사 앞에서>라는 책이다. “절대다수의 지지로 당선이라 선언되었었고, 나중에 꽃다발을 받을 때 보아도 분명히 영예스런 우리의 대표 중에 끼었었고….” “아이들이 클수록 라디오의 필요를 느끼었었고….” 영어를 깨친 1950년대 인텔리의 글 버릇이라고 봐야 할까.
예전 ‘과거사진상규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체가 유행한 적이 있다. 난 ‘과거사 진상’이란 말뜻을 달리 풀이하고 싶다. ‘었’으로 괜히 낱말을 비만하게 하는 행위는 과거사를 ‘진상’으로 만드는 셈이라고. 과거를 깔끔 담백하게 처리하자. 쓸데없는 ‘었’은 진상이다.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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