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무반주첼로모음곡(Suites No.1-6 BWV 1007-1012) 제작시기1717~1723년 쾨텐
Suites violoncelle JS Bach / 마르크 코페이Marc Coppey 첼로
첼로Violoncello, 1711년 베니스산 마테오 고프릴러Matteo Goffriller, Venise 1711
Les six suites pour violoncelle de JS Bach, interprétées par
https://www.youtube.com/watch?v=4l5Ef8hMXEg
“우리의 적은 미국이다”
- 남현진 열사(1970-1991)
▲ 남현진 열사(1971-1991) :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입학. '민족사상연구회'와 영어과 학회 활동을 하며 5 공화국 비리 척결, 노동운동 탄압 중지, 통일선봉대 활동들의 학생운동을 실천하였다. 1990년 11월 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반미 통일열사 남현진
남현진 열사는 1970년 2월 22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민족사상연구회와 영어과 학회에 가입 후 전두환 정권 비리 척결, 노동운동 탄압 반대들의 학생운동을 실천했다. 1년 뒤인 1989년, 외대 총학생회장 사회부장을 맡고 전대협 통일선봉대에서 활동하는 등 한국외대 학생운동권 세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퍼졌고, 노태우 정권은 평양 세계축전에 남한 대학생들이 방문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문익환 목사가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난 것을 구실로 갑작스러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전대협의 대학생 방북 계획을 금지했다. 남북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학생운동마저 대대적으로 탄압당한 상황이었지만 전대협 측에서는 이에 순응하지 않았다. 전대협은 임수경 학생을 북한으로 입국시켰고, 이는 남북한 양측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남한 측의 인물이 방북하는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평범한 여대생이 입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남한 측의 여론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평화통일을 위해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자는 임수경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에 여론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주한미군은 당시 한국 국방안보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고, 이는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할 정도였다. 이처럼 주한미군 철수는 남한에서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임수경은 귀국 즉시 안기부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아 최종 징역 5년형을 받았고 임수경과 관련된 단체들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당국에게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특히 남현진 열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으로 임수경과 대학교 동문이고, 총학생회의 간부이며, 임수경의 방북을 주도한 전대협 통일선봉대 출신이기까지 했다. 이 탓에 남현진 열사는 군 입대와 함께 부대 지휘관들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군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남현진 열사는 1991년 2월 3일 부대 근처 철조망 울타리 밖의 인근 야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헌병대 측에서는 남현진 열사의 자살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로 인해 헌병대 측에서 조작을 가했다는 여러 정황 증거가 밝혀졌다. 또한 남현진 열사가 선임병들에게 마구 구타당해 부상을 입었고, 사건 당일에도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계속해서 폭행당했다는 사실 또한 드러났다. 그러나 자료부족과 군 내부의 은폐 등의 한계로 인해 남현진 열사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으며,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출처 : 모란공원사람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