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설거지나 하세요”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없다. 빈 식탁에 흰 종이 한 장만 달랑 놓여 있다.
"여보 시장 갔다 올께, 밥 차려 먹어."
아유, 밥이나 좀 차려 놓고 가지. 그렇지만 내가 간 큰 남편은 아니잖아. 냉장고 뒤져 김치 꺼내놓고 밥통에서 밥을 퍼 얌전히 식탁 앞에 앉는다. 그런데 `갔다 올께`라고? 밥은 못 차려주더라도 쪽지는 제대로 써야지. 맞춤법 바뀐 지가 언젠데. 어디 이걸로 한번 기를 꺾어 볼까?
아직도 맞춤법이 바뀐 걸 모르는 분들은 살짝 알려드릴 테니 기억해 두기 바란다.
전에는 `갈께`, `할께`처럼 `-ㄹ께`로 적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이젠 `갈게`, `할게`처럼 표기하는 게 맞다. 자세히 설명하면 ⑴`-ㄹ게`, `-ㄹ지니라`, `-ㄹ지어다`, `-올시다`처럼 의문을 나타내지 않는 어미들은 예사소리로 적고 ⑵ `-ㄹ까`, `-ㄹ꼬`, `-리까`, `-ㄹ쏘냐`처럼 의문을 나타내는 것들은 된소리로 적는다.
"딩동." 아 드디어 오셨군. 장바구니부터 받아놓고….
"여보, 이리 앉아봐요. 1988년에 맞춤법이 바뀌어서 이젠 `갔다 올께`란 말은 없어졌어. `갔다 올게`라고 써야지."
"뭐라고요, 이 양반이. 힘들어 죽겠는데. 빨리 설거지나 하세요."
2003/03/30 중앙일보
'우리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여자가 몸을 옹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0) | 2022.11.19 |
---|---|
[우리말 이야기] 자발적 노예 (2) | 2022.11.19 |
[우리말 이야기]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 체 만 체다 (2) | 2022.11.13 |
[우리말 이야기]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 2022.11.09 |
[우리말 이야기]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4) | 2022.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