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야
네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시린 겨울을 견디고 새봄이 오듯
동글동글 말간 네가 오는구나.
맑디맑은 아이.
새봄에 태어난 봄 아이. 은수.
3월 3일, 네 생일이야.
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고
네 눈을 바라보며 축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은수야, 생일 축하해!
은수가 시리지 않도록 마음 가득 온기를 전한다.
지나간 겨울,
우연히 겨울산을 보았지.
꽃이 피고, 푸름으로 꽉 찼던 산은 속까지 훤하게 보였어.
나뭇잎 하나 달고 있지 않은 앙상한 나목들은
자신을 다 드러내고도 당당하게 서 있더구나.
순간 생각했지.
나는 저 나무처럼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나체로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은 뭘까.
스스로 생긴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어.
부끄럽게도 난 말랑말랑한 세상이 좋았어.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됐는데도 말이야.
되도록 아픈 세상은 보고 싶지 않았고, 만나고 싶지 않았어.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다녔고,
외면할 수 있으면 눈 감아 버렸지.
은수와 네 나이 또래의 학생 열사들을 알기 전에는.
은수는 학교 폭력을 견디다 못해 끝내 먹통 같은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표현했지.
학생 열사들은 못 들은 척하는 세상에 제 몸을 불사르며 말을 했지.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내가 아프다고 타인의 슬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휑한 겨울 산에서 속을 다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슬프게도 너와 열사들의 외침을 듣고 기억하는 이들은 잘 없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라며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라고 했지.
하지만 제 주인만을 위해 뛰는 인간의 심장은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는 않아.
그럼에도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심장을 가진 인간이 해야 할 소중한 그 무엇이며,
이것이야말로 삶이 진실에 베여 목숨을 끊는 이들의 무참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되겠지.
은수야,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스스로 던졌던 질문의 답을 찾는다.
겨울산의 나목으로 서도 부끄럽지 않을 삶에 가깝기 위해
나는 오늘 너의 슬픔을 공부한다.
삶이 진실에 베여 무참히 스러진 이들의 슬픔을 공부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공부를.
2022.03.02. 은수 생일에 은수를 기억하며 하루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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