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됐거든?`의 정체
"너 개미가 사는 데 주소 알아?"
"……" "허리도 가늘군 만지면 부러지리."
이런 썰렁한 농담을 들을 때 흔히 돌려주는 한마디가 있다.
"됐거든?"
시중에 퍼져 있는 오래된 유머 한 토막이다. 여기 나오는 '됐거든'은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시킨 말이다. "됐거든? 너도 똑같거든?" 이런 투의 '○○거든' 꼴로 무한정 만들어 쓸 수 있는 생산성 높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정체를 두고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런 표현이 맞는 것이냐는 게 의심의 요지다.
좀 더 들어가면 '됐거던'이라 해야 하는 게 바른 말 아니냐 또는 '됐거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말도 괜찮은 것이냐,아니면 '됐걸랑'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투리인가 하는 것 등이 이 말에 대해 품는 의문이다.
실은 그 전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었다. 지금도 어떤 일이 별로 내키지 않거나 누군가의 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 때 또는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할 때 우리는 한마디로 "됐어!"라고 한다. 이는 의미적으로 "싫어"라는 뜻을 담아 하는 말인데,'되다'의 사전적 풀이에는 없지만 관습적으로 써오던 반어적 표현법이다.
요즘은 이 말이 '됐거든?' 하고 끝말을 높이면서 강세를 주는 것으로 변했을 뿐이다. 때로는 존칭을 나타내는 조사 '요'를 붙여 쓰기도 한다. 우선 '됐걸랑'은 '됐거들랑'의 준말이다. 둘 다 엄연히 표준어이고 '됐거든'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다만 '됐걸랑'이나 '됐거들랑'은 '됐거든'에 비해 훨씬 구어체이다.
어미 '-거들랑'은 두 가지로 쓰인다. 하나는 '해할 자리'에 쓰여,청자는 모르고 있을 내용을 가르쳐 준다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로서의 쓰임새다. '그 무렵 우리는 서울에서 살았거들랑''사실은 그 아이가 내 친구 동생이거들랑'처럼 쓰인다.
물론 이때 '-거들랑' 자리에 '-거든'을 넣어도 똑같은 말이 된다. 어미 '-거든'도 '해할 자리'에 쓰여,청자가 모르고 있을 내용을 가르쳐 줌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랑이나 감탄의 느낌을 띨 때가 많다. 요즘 유행하는 "됐거든?"의 말법은 이 용법에서 발전한 것이다. 발음할 때는 가급적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뚝뚝한 어투로 말끝을 올려 쏘아붙이는 게 요령이다. 이는 자신이 하는 말을 상대에게 강조하고 확인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다른 하나는 '연결어미'로서의 쓰임새다. 이때는 '어떤 일이 사실이면''어떤 일이 사실로 실현되면'의 뜻을 나타낸다. '철수를 만나거들랑 내 말을 전해라./어려운 일이 생기거들랑 연락하도록 해라./서울에 가거들랑 편지해라' 같은 게 그 용례이다. 이는 형태적으로는 어미 '-거든'과 조사 '-을랑'이 결합한 말이다. 의미적으로는 영어의 가정법 'If~' 문장이 나타내는 것과 비슷하다.
시인 문태준은 한가위를 다루면서 미당 서정주가 생전에 추석에 관한 시를 꽤 여러 편 썼다고 했다. 그가 소개하는 서정주의 시 '팔월이라 한가윗날 달 뜨걸랑'은 이렇게 시작한다.
"팔월이라 한가윗날 달이 뜨걸랑,/무엇을 하다가 이겼다는 자들이여/그 이긴 기쁨만에 취하들 말고/그대들에게 져서 우는 자들의/설움을 또 같이 서러워할 줄 알라…."
여기 보이는 '뜨걸랑'이 '뜨거들랑'의 준말이면서 연결어미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도 '뜨거든'으로 바꿔 써도 같은 말이다. '-거든' 역시 연결어미의 기능이 있고 의미도 똑같다. 그러니 종결어미로 쓰일 때나 연결어미로 쓰일 때나 '-걸랑/-거든/-거들랑'이 모두 같은 말이고 모두 표준어이다.어떤 이는 이런 말들을 방언이 아닐까 또는 '~거던'이나 '-거덩'이 맞는 표기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거덩'은 입말에서 잘못 쓰는 말이고 '-거던'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거든'의 잘못이라고 정리했다.
2008/09/19한국경제
-거든2
「참고 어휘」-거들랑, -면
「어미」
1 ((‘이다’의 어간, 용언의 어간 또는 어미 ‘-으시-’, ‘-었-’, ‘-겠-’ 뒤에 붙어))
「1」 ‘어떤 일이 사실이면’, ‘어떤 일이 사실로 실현되면’의 뜻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그분을 만나거든 꼭 제 인사 말씀을 전해 주세요.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거든 내게 꼭 기별을 해라.
⸱혹시 길이 미끄럽거든 지하철을 이용해라.
⸱그 사람이 정말로 선생님이 보낸 사람이거든 내일 우리 모임에 데려오너라.
⸱군인이 되었거든 명예를 생명같이 알아야 한다.
「2」 앞 절의 사실과 뒤 절의 사실을 비교하여, 앞 절의 사실이 이러하니 뒤 절의 사실은 더욱 당연히 어떠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흔히 뒤에는 의문 형식이 온다.
⸱까마귀도 어미의 은혜를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 부모의 은혜를 모르겠느냐?
⸱동생이 저토록 영리하거든, 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복동이가 제아무리 힘이 셀지라도 장사님께 비하면 한낱 어린애이거든, 하물며 제 아우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말을 배우자 천자문을 외웠거든, 장부가 되어서 사서삼경을 모르랴.
2 ((‘이다’의 어간, 용언의 어간 또는 어미 ‘-으시-’, ‘-었-’, ‘-겠-’ 뒤에 붙어))
「1」 해할 자리에 쓰여, 청자가 모르고 있을 내용을 가르쳐 줌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 자랑이나 감탄의 느낌을 띨 때가 있다.
⸱이 사진 좀 봐.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거든.
⸱농사란 땅을 잘 다루어야만 많은 소출을 낼 수 있거든!
⸱난 다른 사람보다도 건강해. 매일 약수터에 올라가 운동을 하거든.
「2」 해할 자리에 쓰여, 앞으로 할 어떤 이야기의 전제로 베풀어 놓음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
⸱오늘 체육 시간에 씨름을 배웠거든.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끼리 씨름판을 벌이다가 한 아이가 다쳤어.
⸱어려운 거 하다가 떨어져 다리라도 부러져 봐, 그놈은 밥 빌어먹을 거밖에 할 게 없거든. 위험에 대한 보상이 없는데 누가 목숨 걸고 미친 짓을 하겠어.≪한수산, 부초≫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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