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5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사람의 일 : 천양희

사람의 일 / 천양희 ​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시집 『오래된 골목』(창비, 2003)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당신의 문체 : 강연호

당신의 문체 / 강연호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당신 당신에 대한 기억은 귀로 시작되더군 당신은 서술어를 잠시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고 당신은 부정인지 긍정인지 모를 표정을 자주 짓고 그럴 때 세상은 비스듬히 깊어지는 것이어서 나는 내 속내를 털어놓는 줄도 모르고 다 털어놓아야 했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먼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지요 이쯤 해서는 내 입술이 당신의 귀에 살짝 닿기도 했을라나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누가 한 말은 탄식일까요 비명일까요 완성이었다면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도대체 생겼겠어요? 유행가 가사에 인생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줄줄 나를 흘리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못 이겨 조금씩 말이 늘어지고 서술어를 잠시 머뭇..

브람스 피아노소나타 1번, 리스트/슈베르트 가곡(피아노 편곡),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 적멸 : 강연호

적멸 / 강연호 ​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 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동안 베껴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 ​ ​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브람스 헝가리 춤곡 : 가브리엘 베베셀레아 - 연두의 내부​ : 김선우

연두의 내부​ / 김선우 ​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 부산한 발소리 상상한다 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한 걸 거라고 ​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 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 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 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 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 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 아마도 사랑하는 일처럼 ​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김선우, 창비, 2012)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1786-1826) ‘무도회의 권유’"Invitation to Dance" (orche..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어떤 경우 : 이문재

어떤 경우 /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문재, 문학동네, 2014)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 교향곡15번Symphonie Nr. 15 A-Dur, op. 141 I. Allegretto II. ..

슈베르트 즉흥곡 넷D899, 즉흥곡 넷D935 : 미츠코 우치다의 슈베르트 즉흥곡과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슈베르트 즉흥곡 - 그리운 나무​ : 정희성​

그리운 나무​ / 정희성​ ​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 -(정희성, 창비, 2013) 미츠코 우치다Mitsuko Uchida - Live at Wigmore Hall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즉흥곡 넷4 Impromptus D899 즉흥곡 넷4 Impromptus D935 미츠코 우치다Mitsuko Uchida 피아노 Live from Wigmore Hall https://www.bilibi..

하이든 피아노소나타 32번, 47번, 49번, 슈베르트 즉흥곡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불면 : 김정임

불면 / 김정임 오늘밤은 이천년 전 가여워서 멋진 남자에게 가 봐야겠다 사마천 옆에 앉아 먹물 갈아주고 꽃차 한 잔 나눠 마시게 세월이 별 건가 천년이 백년이고 세평 방이 천하인 것을 장강에 지는 꽃잎 얻어 타고 황해에 이르면 새벽이 오겠네 -『새여울』(김정임 외, 시아북, 2023 제30호, 97쪽)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 피아노소나타 32번Sonate (Divertimento) Nr. 32 op. 53 Nr. 4 g-Moll Hob.XVI:44 피아노소나타 47번Sonate (Divertimento) Nr. 47 op. 14 Nr. 6 b-Moll Hob.XVI:32 피아노소나타 49번Sonate Nr. 49 op. 30 Nr. 2 cis-Moll Hob.XVI:36..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봄 / 이성부(1942~2012)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우리들의 양식』 (이성부, 민음사, 1974)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당신과 조용히 늙어가고 싶습니다 : 문계봉

당신과 조용히 늙어가고 싶습니다 / 문계봉 - 운유당(暈遊堂) 서신(書信) ​ 오늘 차를 타고 오다가 문득, 당신과 함께 조용히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안타깝지도 슬프지도 않을 만큼의 거리를 운명처럼 인정하며, 또한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망도 접어두고, 다만 지켜보면서, 서로를 많이 걱정하고, 가끔 당신의 어깨와 머리카락과 마른 몸을 만지며 그렇게 함께 늙어가는 삶, 앞산의 능선을 닮아가는 주름과 그윽한 눈매와 부는 바람에 보기 좋게 흩날리며 헝클어지는, 하얗게 센 머리칼과 너그러운 눈빛을 함께 만들어가는 삶, 그런 삶을 당신과 함께 살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순전히 천연덕스럽게 투명한 햇살과 짙푸른 저 가을 하늘 때문입니다. 생각 뒤의 먹먹함은 온전히 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