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5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 허연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 허연 ​ 수도원에서 도망쳤다 ​ 신을 대면하기엔 나는 단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 짐을 싸들고 욕망이 쏟아져 내려오던 비탈길을 내려왔다 ​ 모든 걸 다해 단 몇 줄로 정리된 나를 바치고 싶었지만 ​ 반찬도 없이 식은 밥을 먹으며 구멍 난 튜니카를 꿰매며 잊혀도 좋으니 거룩하고 싶다고 천 번을 되뇌었지만 ​ 그레고리안 성가가 안개처럼 흘러다니는 산길을 버렸던 단어들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내.려.왔.다. ​ 고통받는 삶의 형식이 필요했다 ​ 시를 쓰면서 슬픔에 슬픔을 보태거나 죽음에 죽음을 보태는 일을 했다 ​ ​ - 시선집 『천국은 있다』 (허연, 아침달, 2021, 18-19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산수유꽃 : 박형준

산수유꽃 / 박형준 ​ 논둑에 앉아 산수유를 바라봅니다 얕은 구릉에 무리져 핀 산수유가 논바닥 웅덩이에 비칩니다 빛이 꽃 그림자에서 피어납니다 저쪽에서부터 농부가 황소를 몰고 생땅을 갈아엎고 있습니다 논바닥 웅덩이가 흔들립니다 땅에서 향내가 솟구칩니다 소발굽에서 물집 잡힌 저 산수유꽃 그늘 이런 아침에 당신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산간마을의 봄빛이 저만큼 깊습니다 ​ -『춤』(박형준, 창비, 2005)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

브루크너 교향곡 9번 : 이반 피셔 - 삶 : 김용택

삶 / 김용택 ​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종일이다.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 ​ -(김용택, 위즈덤하우스, 2015)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1824~1896) 교향곡 9번Sinfonie Nr. 9 d-..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오십 미터 : 허연

오십 미터 / 허연 ​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맨 처음의 봄 : 오광수

맨 처음의 봄 / 오광수 봄꽃이란 봄꽃 다 피었을 때 우리 생도 피었으면 좋겠네 그늘 속 숨죽이던 이끼도 연파랑 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네 산수유는 이미 노랗고, 개나리는 저리도 환한데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목련꽃 아래서 입맞춤 하던 순간 혼절하듯 숨을 멈추던 당신 시나브로 청춘은 시들어 이제는 꽃이 진자리 송홧가루 흩날리는 지상에서 아직도 네가 그리운 건 지병인거야 봄꽃이란 봄꽃 다 질 때 우리 생도 저물었으면 좋겠네 당신과도 그냥 지나는 소문처럼 찰나의 어디쯤서 스쳤으면 좋겠네 구절초 같은 남루, 먼지 쌓인 민들레인들 어떤가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맨 처음의 봄 꽃 진 자리, 꽃이 필 자리 ​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오광수, 애지, 2019)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주일 2 : 천상병

주일 2 /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현대시학』, 1969. 11 『천상병 시선』(천상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7-18쪽)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전주곡 열Preludes, Op. 23 No. 1 in F-sharp minor: Largo No. 2 in B-flat major: Maestoso No. 3 in D minor: Temp..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강물 : 천상병

강물 /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천상병, 미래사, 1991)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 I. Maestoso-Allegro con brio ed appassionato II. Arietta-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

드보르자크 피아노오중주 2번 : 오이스트라흐현악사중주단, 엘리소 비르살라제 -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 : 이능표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 / 이능표 ​ ​ 강물을 따라 송어 떼가 지나갔다. “저들은 다시 오지 않아!”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발목을 적시는 희미한 불빛처럼 사랑하냐고 그녀가 묻고 그립다고 그가 대답했다. 새벽 두 시의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강물을 거슬러 송어 떼가 돌아왔다. “그때 그 송어가 아니야!”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발목을 적시는 희미한 불빛처럼 사랑하냐고 그녀가 묻고 그립다고 그가 대답했다. 새벽 두 시의 통화는 늘 그렇게 끝이 났다. 강물이 강물을 밀어내듯 천금 같은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 -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달아실, 2024) . 로그인만 하면 그냥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새 : 천상병

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사상계』, 1959. 5 / 『천상병 시선』(천상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24-25쪽)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번Klaviersonate Nr. 32 in c-Moll Op. 111 I. Maestoso-All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