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5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시간들 : 안현미

시간들 / 안현미 ​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 ​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 김선우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 김선우 ​ 세상에 소음 보태지 않은 울음소리 웃음소리 그 흔한 날갯짓 소리조차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뿔도 침도 한 칸 집도 모래 무덤조차도 ​ 배추흰나비 초록 애벌레 배춧잎 먹고 배추흰나비 되었다가 자기를 먹인 몸의 내음 기억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 나뭇잎 쪽배처럼 허공을 저어 돌아온 배추흰나비 늙어 고부라진 노랑 배추꽃 찾아와 한 식경 넘도록 배추 밭 고랑 벗어나지 않는다 ​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살아도 무거운 벼랑이 몸속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배추흰나비 닻을 내린 늙은 배추 고부라진 꽃대궁이 자글자글 끓는다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김선우, 문학과지성사, 2007, 146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심 중 : 우창자

심 중 / 우창자 진달래는 떠나셨습니다. 그 커다란 산을 붉게 물들이시던 개나리는 떠나셨습니다. 그 울창한 동네 담장을 수 놓으시던 제비꽃이 오셨습니다. 작은 얼굴을 부끄러워하면서 민들레가 오셨습니다. 이미 푸르러 버린 개나리를 아쉬워하면서 심중엔 벗꽃 눈발이 휘날립니다. 1984.4.28 -우창자 글 모음 『고통의 척도를 헤아릴수 없음으로 해서』(우창자 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 Assai vivace III. Adagio sostenuto IV. Introduzi..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그대 생각​ : 고정희

그대 생각​ / 고정희 ​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 - ​『아름다운 사람 하나』(고정희, 도서출..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봄비 : 김소월

봄비 / 김소월 ​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 앉아 우노라. ​ - 『하루 한 편 김소월을 새기다』(김소월, 영진닷컴, 2022)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목련 : 류시화

목련 / 류시화 ​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류시화, 푸른숲, 2008)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슈만 푸가 넷, 분테 블레터(다채로운 소곡), 쇼팽 폴로네이즈 넷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천왕봉을 오르며 : 김인육

천왕봉을 오르며 / 김인육 ​ 산에 올라보면 안다 그리움이 어떻게 산이 되는가를 함묵의 봉우리가 울어 울어 더욱 깊어지는 내력을 그 눈물이 흘러 바다가 되는 세월을 바닷물이 왜 눈물의 맛인가를 안다. ​ 지리산은 선 채로 억 년을 비에 젖고 선 채로 억 년을 울음 운다 그렇다고, 그 기다림의 당위나 애련의 연유에 대해선 묻지마라 간절한 부름은 귀에 닿지 않고 영혼에 가 닿는 법 ​ 사랑아, 나도 너에게 그렇게 왔다. ​ ​ 『사랑의 물리학』(김인육, 문학세계사, 2016)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 ~ 1856) 푸가 넷4 Fugen, Op. 72 1. in D minor, Nicht schnell 2. in D minor, Sehr lebhaft 3. in F minor, Nic..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기억한다 : 류시화

기억한다 / 류시화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래된 상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쓴 시인을 기억한다 ​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을 간직한 사람이 많은 것이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라고 말한 시인을 기억한다 ​ 상처 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고 쓴 시인을 기억한다 ​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에 자신이 미워졌다고 고백한 시인을 기억한다 ​ 눈사람에게 추워도 불 가까이 가지 말라고 충고한 시인을 기억한다 ​ 끝까지 울며 마지막 울음 속에 웃음이 숨어 있다고 말한 시인을 기억한다 ​ 사람이니까 넘어져도 괜찮다고 쓴 시인을 기억한다 ​ 나는 정원사이자 꽃이라고 노래한 시인을 기억한다 ​ 언제부터 시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언제부터 시인이기를 그만두었느냐고 되물은 시인을 기억한다 ​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느냐고 물은..

베토벤 '코리올란' 서곡, 피아노협주곡 2번, 1번 : 엘리소 비르살라제 - 민들레 : 나태주

민들레 / 나태주 ​ 우주의 한 모서리 ​ 스님들 비우고 떠나간 암자 늙은 무당이 흘러, 흘러 들어와 궁둥이 붙이고 사는 조그만 암자 지네 발 달린 햇빛들 모이는 마당가 장독대 깨어진 사금파리 비집고 민들레는 또 한번의 생애를 서둘러 완성하고 바람결에 울음을 멀리 멀리까지 날려보내고 있었다 ​ 따스한 봄날의 하루. ​ ​- 『슬픔에 손목 잡혀』(나태주, 시와시학사, 2000)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코리올란' 서곡Coriolan-Ouverture, Op. 62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협주곡 2번Klavierkonzert Nr. 2 in B-Dur, Op.19 ..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꽃의 이유 : 마종기

꽃의 이유/ 마종기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그 나라 하늘빛』(마종기, 문학과지성사, 200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