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마음 : 곽재구

마음 / 곽재구 아침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흙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 군데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쥔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 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곽재구, 창비, 1995)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

바흐 파르티타 1번,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7번,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14번, 악흥의 순간 여섯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인생각, 2013)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Live in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2015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파르..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소포 : 이성선

소포 / 이성선 ​ 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아래 노란 들국화 몇 송이 한지에 정성 들여싸서 비밀히 당신에게 보내 드립니다. ​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 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 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 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 당신만이 이 향기를 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 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 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 당신 찾아가겠습니다. ​ - 『시 읽는 기쁨 2』(정효구, 작가정신, 2014)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 *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정희성, 창비, 2008)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소년 : 윤동주

소년 / 윤동주 ​ ​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스타북스, 2022, 22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 김현태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 김현태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이란 잠자리 날개가 바위에 스쳐, 그 바위가 눈꽃처럼 하이얀 가루가 될 즈음, 그때서야 한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이 인연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등나무 그늘에 누워 같은 하루를 바라보는 저 연인에게도 분명,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눈물겨운 기다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겨울꽃보다 더 아름답고, 사람 안에 또 한 사람을 잉태할 수 있게 함이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나무와 구름 사이 바다와 섬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 천, 수 만 번의 애닯고 쓰라린 잠자리 날개짓이 숨쉬고 있음을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은, 서리처럼 겨울담장을 조용히 넘어오기에 한 겨울에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습..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길 샤함 - 물 따라 나도 가면서 : 김남주

물 따라 나도 가면서 / 김남주 ​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건듯건듯 동풍이 불어 새봄을 맞이했으니 졸졸졸 시내로 흘러 조약돌을 적시고 겨우내 낀 개구쟁이의 발 때를 벗기러 가지. ​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오뉴월 더운 날에 가을을 만났으니 돌돌돌 도랑에 흘러 농부의 시름 덜고 타는 들녘 벼 포기를 적시러 가지. ​ 봄 따라 여름 가고 가을도 깊었으니 나도 이젠 깊은 강가에 잔잔하게 흘러 어디 따뜻한 포구로 겨울잠 자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V..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남쪽 마을을 지나며 : 심재휘

남쪽 마을을 지나며 / 심재휘 ​ 서러움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참나무 숲을 지나자 가을 저녁은 목화밭 너머 봉분들과 참 다정해 보였습니다. 마을은 낡은 그림자들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전생 하나를 밟고 신발이 더러워지기도 했습니다만 무덤 같은 신발로 오래 걷다 보면 낯선 곳에서도 겨울은 맞을 만합니다. 단지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에 탐욕스럽게 매달려 있는 모과처럼 오늘과 나는 서로 이복형제 같아서 조금 서러웠습니다.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심재휘, 최측의농간, 2017,13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크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문학과지성사, 1991, 53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시전집 『백석시전집(白石詩全集)』(창비, 1987)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