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12월 : 문계봉

12월 / 문계봉 이제 이곳은 겨울, 몇 사발의 그리움과 서너 개의 소문들로 견뎌야 하는 계절 이미 들판 여기저기선 불이 오르고 창문마다 방풍(防風) 비닐이 쳐졌는데도 겨울은 선뜻 마을로 들어와 가난한 살림들을 위협하지 않는다 아는 것일까 12월 떠날 것들 이미 다 떠나고 이곳엔 살 부비는 사랑만이 남아 있음을 하지만 무엇인가 이 마음, 모든 것들이 숙면을 준비하며 분주한 이때 자꾸만 돌아보며 흔들리는 마음, 새해가 오고 다시 싸락눈 뿌리며 최후로 겨울이 떠난다 해도 잘 가라 손짓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이 마음은. ​ -『너무 늦은 연서』(문계봉, 실천문학사, 2017)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사랑의 온도 / 나호열​

사랑의 온도 / 나호열 ​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뎁힐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

쇼팽 녹턴, 폴로네이즈 6번 ‘영웅’, 자장가, 환상 즉흥곡, 전주곡, 피아노소나타 3번 : 필리프 코파체프스키 - 쨍한 사랑노래 : 황동규

쨍한 사랑노래 / 황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황동규, 문학과지성사, 2003, 2013)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1810-1849) 녹턴 4번Nocturne in F major, Op. 15 No. 1 녹턴 2번Nocturne in E Flat Major, Op..

바흐 무반주첼로모음곡(기타 버전) : 페트리트 체쿠 - 길 : 윤동주

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소와다리, 2016)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무반주첼로모음곡(Suites No.1-6 BWV 1007-1012) 제작시기1717~1723년 쾨텐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구성:프렐류드, 알..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11월 : 이외수

11월 /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이외수, 해냄출판사, 2010) .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아득한 한 뼘 : 권대웅​

아득한 한 뼘 / 권대웅 ​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동네지요 ​ 이곳 속 저곳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 이 생 너머 저 생 아득한 한 뼘이지요 ​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권대웅, 문학동네, 2017초판, 2021) ​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새 : 이병률

새 / 이병률 자면서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을 뒤척입니다 ​ 내가 뒤척일 적마다 누군가는 내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 지구의 저 가장 안쪽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 자면서 여러 번 뒤척일 일이 생겼습니다 자다가도 가슴에서 자꾸 새가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가슴팍이 벌어지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앉아야 죽지를 않겠습니다 ​ 어제는 오늘은 맨밥을 먹는데 입이 썼습니다 ​ 흐르는 것에 이유 없고 스미는 것에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나는 생겨먹었습니다 ​ 신(神)에게도 신이 있다면 그 신에게 묻겠습니다 ​ 지구도 새로 하여금 뒤척입니까 ​ 자다가도 몇 번을 당신을 생각해야 이 마음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까 ​ -(이병률, 문학과지성사, 2017) ​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

브람스 바이올린협주곡 : 막심 벤게로프, 가보르 타카치-나기 - 가을 : 김현승(1913~1975)​

가을 / 김현승(1913~1975) ​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 시집 『가을의 기도』(김현승, 미래사, 1991)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D-Dur für Violine und Orchester op. 77 I. Allegro non troppo II. Adagio III. Allegro giocoso, ma n..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조그만 사랑노래 : 황동규

조그만 사랑노래 / 황동규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황동규, 문학과지성사, 1999)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박남준​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박남준 ​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 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 마련한 돈 백만 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지 마을 사람들이 그 돈으로 관을 마련하고 뒷일을 다 마쳤을 때 그만 넣어왔다 피붙이도 없던 그 놋숟가락 언젠가 이가 부러져 솥 바닥을 긁다가 목이 부러져 내 눈 밖에 뒹굴던 것 ​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