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31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 안나 치불레바, 발레리 폴리안스키 - 길 : 나호열

길 / 나호열 먼 길을 돌아서 가는 중이다 따뜻한 가슴에 닿기 위하여 바늘 끝을 건너뛰고 있는 중이다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37쪽) 로그인만 하면 볼 수 있습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피아노협주곡 2번Klavierkonzert Nr. 2 in c-Moll, Op. 18(1900-1901) I. Moderato II. Adagio sostenuto III. Allegro scherzando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 교향곡 5번Sinfonie Nr. 5 in e-Moll, Op. 64 (1888) I. Andante – Allegro con anima II.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물방울 우주』(이성선, 황금북, 2002) /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휴머니스트, 2015, 52쪽)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긴 편지 : 나호열

긴 편지 / 나호열 ​ ​ 풍경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등켜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186쪽)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당신이라는 말 : 나호열

당신이라는 말 / 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천암 능인 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295쪽)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전주곡 열Preludes, Op. 23 No. 1 in F-sharp mi..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얼음의 온도 : 허연​

얼음의 온도 / 허연 ​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 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내가 원하는 천사』(허연, 문학과지성사, 2012)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of the Lark) Andant..

쇼팽 녹턴, 폴로네이즈 6번 ‘영웅’, 자장가, 환상 즉흥곡, 전주곡, 피아노소나타 3번 : 필리프 코파체프스키 - 사람의 일 : 천양희

사람의 일 / 천양희 ​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시집 『오래된 골목』(창비, 2003)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1810-1849) 녹턴 4번Nocturne in F major, Op. 15 No. 1 녹턴 2번Noctu..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달아실, 2017)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

슈베르트 즉흥곡 넷D899, 즉흥곡 넷D935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당신과 조용히 늙어가고 싶습니다 : 문계봉

당신과 조용히 늙어가고 싶습니다 / 문계봉 - 운유당(暈遊堂) 서신(書信) ​ 오늘 차를 타고 오다가 문득, 당신과 함께 조용히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안타깝지도 슬프지도 않을 만큼의 거리를 운명처럼 인정하며, 또한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망도 접어두고, 다만 지켜보면서, 서로를 많이 걱정하고, 가끔 당신의 어깨와 머리카락과 마른 몸을 만지며 그렇게 함께 늙어가는 삶, 앞산의 능선을 닮아가는 주름과 그윽한 눈매와 부는 바람에 보기 좋게 흩날리며 헝클어지는, 하얗게 센 머리칼과 너그러운 눈빛을 함께 만들어가는 삶, 그런 삶을 당신과 함께 살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순전히 천연덕스럽게 투명한 햇살과 짙푸른 저 가을 하늘 때문입니다. 생각 뒤의 먹먹함은 온전히 제 ..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내 마음속 風磬* 하나 · 1​ : 허형만​

내 마음속 風磬* 하나 · 1 / 허형만 ​ 복길리 바닷가에 갔었지 ​ 수평선 먹구름 그물에 걸린 태양이 온몸으로 파닥거릴 때 파닥거리다 지쳐 마침내 피를 토한 채 꼴깍! 숨이 멈추고 핏물 토한 채 쓸쓸함 위로 어선 서너 척 떠서 흔들리고 흔들릴 때 파도 소리 바람 소리로 잊었던 사람들 총총총 별로 돋을 때 ​ 내 마음속 풍경 하나 어찌 그리도 울어쌓든지. ​ *풍경: 처마 끝에 달아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나게 하는 경쇠. ​ - 『영혼의 눈』(허형만, 문학사상사, 2002)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바람에 실어 : 박남준

바람에 실어 / 박남준 ​ ​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아미 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 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 피워올리니 따듯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 보고 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듯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 ​ -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박남준, 문학동네, 2000) 로그인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