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새해의 기도 : 이성선​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이성선 시전집』(이성선, 시와시학사, 2005)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새해 : 피천득

새해 / 피천득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 하늘로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 -『생명』(피천득, 샘터, 1997)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in B-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 Assai vivace III. Adagio sostenuto IV. Introduzione : Largo...Allegro - ..

베토벤 교향곡 9번 : 알렉산드르 루딘 - 세밑 : 신경림

세밑 / 신경림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 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 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 삶의 뜻으로 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 푸섶길 : 풀과 잡목이 우거진 길 -(신경림, 창비, 1999)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교향곡 9번Symphony N..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안부安否 : 나호열

안부安否/ 나호열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픈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 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라기별과 같은 것이다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한 말뜻을 이..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울음 : 박준

울음 / 박준 ​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 -(박준, 난다, 2017)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of the Lark) Andantino espressivo 'April' 눈송이(Snowdro..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눈이 오면 차암 좋지? : 김용택

눈이 오면 차암 좋지? / 김용택 ​ 눈이 오면 좋지?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하얀 색으로 펑펑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지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설레기도 하고 캄캄하게 잃어버린 어린 날들이 환히 불켜지기도 해 턱을 고이고 앉아 아주 천천히 지상으로 하염없이 내려오는 눈송이들을 보고 있으면 참 행복해 무슨 말인가 자꾸 하고 싶지 눈은 이리저리 어디나 내리므로 내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슬픔의 빨랫줄에 가 앉기도 하고 추억의 키타줄을 딩동 건들며 가기도 하지 그리움의 호수에 가만가만 떨어져 금세 사라질 파문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나뭇가지에는 그냥 앉지 못하고 살짝 비켜가기도 해 그리고, 눈은 어디에 내리든 다 녹아 눈이 녹지 않으면 눈이 아니지 내리는 눈을 이렇게..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그리움 : 이시영​

그리움 / 이시영 ​ 두고 온 것들이 빛나는 때가 있다 빛나는 때를 위해 소금을 뿌리며 우리는 이 저녁을 떠돌고 있는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등불 하나 켜든 이 보이지 않고 등불 뒤에 속삭이며 밤을 지키는 발자국소리 들리지 않는다 잊혀진 목소리가 살아나는 때가 있다 잊혀진 한 목소리 잊혀진 다른 목소리의 끝을 찾아 목 메이게 부르짖다 잦아드는 때가 있다 잦아드는 외마디소리를 찾아 칼날 세우고 우리는 이 새벽길 숨가쁘게 넘고 있는가 하늘 올려보아도 함께 어둠 지새던 별 하나 눈뜨지 않는다 그래도 두고 온 것들은 빛나는가 빛을 뿜으면서 한번은 되살아나는가 우리가 뿌린 소금들 반짝반짝 별빛이 되어 오던 길 환히 비춰주고 있으니 ​ - 『滿月』(이시영, 창작과비평사, 1976)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초겨울 편지 : 김용택

초겨울 편지 / 김용택 ​ ​ 앞산에 고운 잎 다 졌습니다. ​ 먼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 눈 내리겠지요. ​ 눈 내리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습니다. ​ ​-『연애시집』(김용택, 마음산책, 2017)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of the Lark) Andantino espressivo 'April' 눈송이(Snowdrop) A..

리스트 '로렐라이', ‘고독 속의 신의 축복’, 리스트/헨델 ’알미라‘에서 사라방드와 샤콘느, 피아노소나타 B단조 -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 *하냥 : 늘 ​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책만드는집, 2018)..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그해 겨울 : 곽효환

그해 겨울 / 곽효환 ​ 한 사람이 가고 내내 몸이 아팠다 겨울은 그렇게 왔다 가지 끝에서부터 몸통까지 여윈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마른기침은 시든 몸 폐부 깊은 곳을 찔렀다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좀체 가시지 않는 통증, 나는 미련을 놓지 않았고 나는 내내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모두들 잠든 새벽 네 시, 혼자 남은 빈 병실 창밖으로 띄엄띄엄 깊은 겨울밤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전조등을 보며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을 헤아렸다 그 겨울은 혹한도 폭설도 없었지만 오랫동안 물러설 줄 몰랐다 어림할 수 없는 그 끝을 견딜 수 없어, 더는 견딜 수 없어 마음을 먼저 보냈으나 봄도, 그도…… ​ 그렇게 겨울은 더 깊어지거나 기울었다 ​ - ​『슬픔의 뼈대』(곽효환, 문학과지성사, 2014)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