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2월은 홀로 걷는 달 : 천양희

2월은 홀로 걷는 달 / 천양희 ​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 듯 받으며 소리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이란 걸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홀로 걸었다​​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천양희, 창비, 2011) 로그인만 하면..

베토벤 교향곡 5번 : 유리 바슈메트 - 입춘 : 배한봉

입춘/ 배한봉 ​ 암 수술로 위를 떼어낸 어머니 집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세간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 아팠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 아파서 자꾸 하늘만 쳐다보았다. ​ 파랗게 새파랗게 깊기만 한 우물 같은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눈물도 못 흘리게 목구멍 틀어막는 짜증을 내뱉었다. ​ 낡았으나 정갈한 세간이었다. ​ 서러운 것들이 막막하게 하나씩 둘씩 집을 떠나는 봄날이었다. ​ 막막이라는 말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그 막막한 깊이의 우물을 퍼 올리는 봄날이었다. ​ 그 우물로 지은 밥 담던 방짜 놋그릇 한 벌을 내게 물려주던 봄날이었다. 열여덟 살 새색시가 품고 온 놋그릇이 쟁쟁 울던 봄날이었다. ​ ​ - ​『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배한봉 외 48인, 나무..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 유리 바슈메트 - 입춘​ : 장석남

입춘​ / 장석남​ ​ 아버지의 사진틀을 갈았다 수염을 깎은 듯 미소도 조금 바뀌었다 이발소를 데리고 가던 아버지의 손가락 마디가 두엇 없던 손을 생각한다 언 몸을 금세 녹여주던 이발소의 연탄난로도 생각한다 연통에 쓱쓱 비누거품을 데우던 이발사의 거품붓도 생각한다 전쟁통에 열 번을 살아나와 열한 번을 총알 속으로 되몰려갔다던 무심한 대화를 생각한다 아무도 몰래 어금니를 꽉 물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미 이십년이 가까워 얼굴 하관이 마구 빠져나오는 낡은 사진틀을 새로 갈아 식탁 의자에 기대놓고 아버지의 관상을 본다 박복한 이마를, 우뚝한 콧날을, 어투를, 기침 소리를 형제들은 골고루 나누어 받았다 길지 않은 인중만은 아무도 물려받지 않으려 했으리…… 허나 그도 알 수는 없다 날은 언제 풀리려나? 강추위다 돌..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장’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 허물 : 나호열

허물 / 나호열​ ​ 옷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동물에서 사람이 되었던 날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 그 날 감추어야 할 곳을 알게 된 그 날 옷은 그로부터 넌지시 위계를 가리키는 헛된 위장의 무늬로 입고 벗는 털갈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진화하였다 ​ 우화羽化의 아픈 껍질을 깨고 비로소 하늘을 갖는 나비를 꿈꾸며 나는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옷을 벗고 또 벗었으나 그 옷은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주었던 그 누구의 눈물과 한숨일 뿐 내 마음이 허물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 가만히 내리는 빗소리 나를 대신하여 허물을 벗는 이의 아픈 발자국 소리로 사무쳐 오는 밤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옷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싶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가장과 위선의 허물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문신으로 나를 향해 먼 길을 오는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농담 : 이문재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이름을 부르다 : 나호열

이름을 부르다 / 나호열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몇 잎 붉게 피어난다 이제는 옛집으로 남은 사람아 끝내 종착역은 더 멀리 떠나 내 몸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어둠을 걸어 닿으리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끝끝내 피어있는 동백아 가여운 내 몸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깃든 장항선 철길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 -『안부』(나호열, 밥북, 2021, 78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1 : 나호열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1 / 나호열 - 동행 ​ 어느 사람은 아프다 어느 사람은 슬프다 어느 사람은 아파서 슬프고 어느 사람은 슬퍼서 아프다 여럿이면서 하나인 그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흘린 눈물을 우리는 노을이라 부른다 ​ -『안부』(나호열, 밥북, 2021, 49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of the Lark) Andan..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수라(修羅) : 백석

수라(修羅) /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

베르사유의 프랑스 바로크 음악 : 알렉상드르 타로 - 만나고 싶은 사람 : 이성선

만나고 싶은 사람 / 이성선 몸에서 소리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매양 알 수 없는 빛에 젖어서 그의 내면으로부터 신비한 소리가 들려오는 고독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이 여름의 깊은 밤 한가운데서 그가 부는 영혼의 맑은 갈대 피리 서쪽에서 왔을까. 세상의 한 골짜기를 열고 안으로 안으로 노래하며 흘러가는 흐느낌 같은 사람 반편 같은 사람 별이 비치는 하늘 아래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비 젖은 바닷가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의 곁에서 깨어 있는 또 다른 그를 들으며 걸어가고 싶습니다. 독경 같은 그 음악으로 빈 손을 적시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별까지 가면 된다』(이성선, 고려원, 1988) / 『이성선 전집1』(이성선 지음, 이희중, 최동호 엮음, 서정시학, 2011) 알렉상드르..

쇼팽 녹턴, 마주르카, 스케르초, 뱃노래, 폴로네이즈 환상곡 :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 한 나무가 있었네 : 박남준

한 나무가 있었네 / 박남준 ​ 쉬지 않고 계율처럼 깨어나 흐르는 물소리와 저 아래로부터 일어나 온 산을 감싼 구름으로 두어 발 한세상이 자욱해질 무렵 죽어 쓰러진 나무등걸 모아 불 지핀다. 맵다. 상처처럼 일어나는 연기. 산중 나무 한 그루 태어나 숨 거두기까지 한 생각 그랬겠다 쓸쓸했을 지난날의 외로움이 울먹울먹 피어나서 이렇게 눈물나게 하는 것인지. 타오르며 전해오는 푸른 나무의 옛날. 불꽃, 참 따듯한 그리움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박남준, 실천문학사, 2021, 43쪽) 프레데리크 쇼팽Fryderyk Chopin(1810-1849) 녹턴 20번Lento con gran espressione in C sharp minor (WN 37) 마주르카 26번Mazurka in E 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