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슈베르트 즉흥곡 넷D899, 즉흥곡 넷D935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어쩌다 나는, : 류근

어쩌다 나는, / 류근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 버리고 싶은 건가 - 『어떻게든 이별』(류근, 문학과지성사, 2016)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즉흥곡 1번Impromptu 1 in C minor Op. 90, D. 899 즉흥곡 2번Impromptu Nr. 2 in E flat major Op...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겨울 숲에서 흔들렸다 : 박남준

겨울 숲에서 흔들렸다 / 박남준 ​ 이 숲에 들기까지 얼마나 오래도록 무겁거나 낯 뜨겁게 가벼웠나 뒤축이 낡은 영혼을 버리고 누군가 걸어간 길이 있다 길을 묻는 이에게 별을 가리키듯 나무들이 직립의 팔을 들어 하늘로 향하는 곳 ​ 눈을 씻고 간절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이곳에서는 덕지덕지 가난한 이름마저 벗어버려 몸에 걸칠 쓸쓸함도, 두려움도 없지만 바람은 끝내 고요 속에 들지 못하고 ​ 새들은 어찌하여 여기 누워 허공을 잊었는가 몸은 아직 세상의 화두에 발을 딛고 있으나 가야 할 곳, 적멸을 묻고 싶을 때 겨울 숲에 들어야 하리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그 속삭이듯 유혹의 곤두선 소름 끝으로 천수수천 토막이 난 채 벼랑에 선 육신을 치 떨어야 하리 혼백이 둬 번은 날아가야 하리 ​ - 『중독자』(박남준,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국수 : 백석

국수 / 백석 ​ ​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곰소에서 : 이대흠

곰소에서 / 이대흠 ​ 나무를 덧대어 만든 커다란 소금창고는 기울어져 있었다 평생을 물에서 오신 소금을 모신 곳이었으니 여전히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이 들어와 있을 때보다 썰물 때 더 기울어져 있었다 ​ 내게 남은 것은 그대가 남기고 간 한줌 소금 같은 그리움이니! ​ 베인 상처에 갯물이 들 때처럼 마음 안이 쓰리고 그대 떠나고 나도 그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 해가 질 것이고 바닷바람에 나는 낡아갈 것이다 조금 더 기울어질 것이다 ​ -(이대흠, 창비, 2010)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빈들 · 1 : 김용택

빈들 · 1 / 김용택 ​ 빈들에서 무를 뽑는다 ​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 나는 하얀 무를 들고 한참을 캄캄하게 서 있다 ​ 때로 너는 나에게 무 뽑은 자리만큼이나 캄캄하다 ​ - 『집』(김용택, 시인생각, 2013, 82쪽)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 교향곡15번Symphonie Nr. 15 A-Dur, op. 141 I. All..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15번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잠 : 김용택

잠 / 김용택 오늘 처음 소쩍새가 울었습니다 돌아눕고 돌아눕다 잠들었습니다 내 야윈 어깨에 달진 얼굴 하나 적막하게 묻혀 있습니다 - 『집』(김용택, 시인생각, 2013)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 교향곡15번Symphonie Nr. 15 A-Dur, op. 141 I. Allegretto II. Adagio–Largo III. Alle..

슈베르트 즉흥곡 넷 D. 899, 피아노 소품 셋,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먼 길 : 이재무

먼 길 / 이재무 ​ 이 세상 가장 먼 길 ​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 몸속 유숙하던 그 많은, ​ 허황한 것들로 ​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 어느날 문득 내게로 돌아가는 날 ​ 길의 초입에서 서서 나는 또, ​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 분홍빛 설렘과 푸른 두려움으로 ​ 벌겋게 상기된 얼굴, 괜시리 ​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 ​ - 『저녁 6시』(이재무, 창비, 2007) Grigory Sokolov plays Schubert, Beethoven, Rameau, and Brahms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즉흥곡 1번Impromptu 1 in C minor O..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김용택 ​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 - 『그 여자네 집』(김용택, 창비..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새들이 조용할 때 : 김용택

새들이 조용할 때 / 김용택 ​ 어제는 많이 보고 싶었답니다. 그립고, 그리고 바람이 불었지요. 하얗게 뒤집어진 참나무 이파리들이 강기슭이 환하게 산을 넘어왔습니다. 당신을 사랑했지요. 평생을 가지고 내게 오던 그 고운 손길이 내 등 뒤로 돌아올 때 풀밭을 보았지요. 풀이 되어 바람 위에 눕고 꽃잎처럼 날아가는 바람을 붙잡았지요. 온몸이 다 꽃이 되었지요.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리고 사랑하기까지 내가 머문 마을에는 날 저물면 강가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고 날이 새면 강물을 따라 한없이 걸었지요. 사랑한다고 말할까요. 바람이 부는데 사랑한다고 전할까요. ​해는 지는데 새들이 조용할 때 물을 보고 산을 보고 나무를 보고, 그리고 당신이 한없이 그리웠습니다. 사랑은 어제처럼 또 오늘입니다. 여..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소나타 1번, 파르티타 2번 : 에피다우루스-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빅토리아 뮬로바 - 한 발, 첫 발자국 : 박남준

한 발, 첫 발자국 / 박남준 ​ 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새장을 사지 않고 주머니를 꺼내 모이 그릇에 채워놓지 않고 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 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 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 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 제 몸의 온기를 나누어 쫓기고 지친 마음을 껴안을 수 있다면 한 뼘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 우주의 시간이 빛날 것이다 새해 첫 마음 한 발, 첫 발자국, 내 안의 바로 너 나 또한 세간의 문을 열고 그 길에 한 걸음 내딛는 시작이기를 -『중독자』(박남준, 펄북스, 2015) 에피다우루스는 기원전 6세기경 펠로폰네소스의 작은 계곡에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한 도시 국가이다. 에피다우루스에서는 환자를 잠재우고 시행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