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 박남준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 박남준​ ​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다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 모진 비바람 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끝 낙숫물 소리 잎 진 저문 날의 가을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 하릴없다 지는 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 쓴다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박남준, 실천문학사, 2010) ▲ 회룡포 : 회룡포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일대에 있는 마을로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이 비상하듯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안아주기 : 나호열

안아주기 / 나호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 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 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 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마음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178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 알레나 바에바 - 구둔역에서 : 나호열

구둔역에서 / 나호열 어느 사람은 떠나고 어느 사람은 돌아오고 어느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어느 사람은 끝끝내 잊혀지지 않고 저 홀로 기다림의 키를 세우고 저 홀로 그림움을 아로새기는 저 느티나무와 향나무 구둔역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무엇이 된다 눈길 닿는 곳 허물어지고 낡아가는 그 무엇의 주인공이 되어 쿵쿵 가슴을 울리며 지나가던 청춘의 기차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누구의 구둔역인가 속말을 되뇌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256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바이올린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878) I. Allegro moder..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있으라 하신 자리에 : 허형만

있으라 하신 자리에 / 허형만 ​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티끌보다 연약한 삶 하나 떠나시온 그 순간부터 이어진 끈으로 지탱하고 서서 애오라지 견고한 만남을 위하여 젖어드는 비바람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깨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부터 감사 찬송으로 끝맺는 밤중까지 때로는 고달프고 때로는 서러우나 오실 날짜 그 순간 기다리면서 휘날리는 흙먼지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 나호열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 나호열 유채꽃밭에 서면 유채꽃이 되고 높은 산 고고한 눈을 보면 눈이 되고 불타오르는 노을을 보면 나도 노을이 되고 겨울 하늘 나는 기러기 보면 그 울음이 되고 싶은 사람아 어디서나 멀리 보이고 한시도 눈 돌리지 못하게 서 있어 눈물로 씻어내는 청청한 바람이려니 지나가는 구름이면 나는 비가 되고 나무를 보면 떨어지는 나뭇잎 되고 시냇물을 보면 맑은 물소리가 되는 사람아 하루하루를 거슬러 올라와 깨끗한 피돌기로 내 영혼에 은어 떼가 되리니 나는 깊어져가고 너는 넓어져가고 그렇게 내밀한 바다를 만들어가는 어디에 우리의 수평선을 걸어놓겠느냐 목숨아, 사람아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36쪽)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 안나 치불레바, 발레리 폴리안스키 - 길 : 나호열

길 / 나호열 먼 길을 돌아서 가는 중이다 따뜻한 가슴에 닿기 위하여 바늘 끝을 건너뛰고 있는 중이다 -『울타리가 없는 집』(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37쪽) 로그인만 하면 볼 수 있습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피아노협주곡 2번Klavierkonzert Nr. 2 in c-Moll, Op. 18(1900-1901) I. Moderato II. Adagio sostenuto III. Allegro scherzando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 교향곡 5번Sinfonie Nr. 5 in e-Moll, Op. 64 (1888) I. Andante – Allegro con anima II.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물방울 우주』(이성선, 황금북, 2002) /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휴머니스트, 2015, 52쪽)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긴 편지 : 나호열

긴 편지 / 나호열 ​ ​ 풍경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등켜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186쪽)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Piano Sonata No. 29..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열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당신이라는 말 : 나호열

당신이라는 말 / 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천암 능인 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나호열, 에코리브로, 2023, 295쪽)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 전주곡 열Preludes, Op. 23 No. 1 in F-sharp mi..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얼음의 온도 : 허연​

얼음의 온도 / 허연 ​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 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내가 원하는 천사』(허연, 문학과지성사, 2012)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ry' 불가에서(By the Hearth)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 'February' 사육제(The Carnival) Allegro giusto 'March' 종달새의 노래(Song of the Lark) And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