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시가 만날 때 1816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바다 : 백석​

바다 / 백석 ​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 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백석, 다산책방, 2014) 구붓하고: 몸이 구부정한. 모래톱: 넓은 몰 벌판. 모래사장. 지중지중: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 의태어. 개지꽃: 나팔꽃. 쇠리쇠리하야: 눈이 부셔. 눈이 시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피아노소나타 32..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무심(無心)에 대하여 : 정호승

무심(無心)에 대하여 / 정호승 ​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왔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있고 어느 때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간다 사랑할 줄 모르면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강물을 따라갈 줄 모르면서도 강물을 따라간다 산을 바라볼 줄 모르면서도 산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지만 모든 것을 버리지도 얻지도 못한다 산사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 한마리 내가 불쌍한지 나를 바라본다 무심히 하루가 일생처럼 흐른다 ​ -『슬픔이 택배로 왔다』(정호승, 창비, 2022)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93) ‘사계’The Seasons, Op. 37a (Royal Concertgebouw, 2015) 'Janua..

슈베르트 즉흥곡 넷D899, 즉흥곡 넷D935 : 그리고리 소콜로프 - 택배 : 정호승

택배 / 정호승 ​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슬픔이 택배로 왔다』(정호승, 창비, 2022)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설중행(雪中行) : 신경림

설중행(雪中行) / 신경림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을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체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서 행복하다. ​-『사진관집 이층』(신경림, 창비, 2014)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

차이콥스키 ‘사계’ : 데니스 마추예프 - 바람이 지는 숲에 잠들겠지 : 박남준

바람이 지는 숲에 잠들겠지 / 박남준 ​ 돌아보면 젖은 슬픔의 기억처럼 눈들이 녹지 않고 잔설로 잔설로 분분한데 숲에 누우면 황금빛 솔잎들 저문 날의 노을로 수북이 진 겨울숲에 누우면 허공중에 난데없는 굽이굽이 서늘한 큰 강물줄기 ​ 강물로 이는 바람에 귀기울이면 낮은 낮은 목소리 마른 풀잎을 울리는 저 바람이 스쳐온 날들 알 듯도 하네 먼 들의 불빛에도 엎드려 흐느끼던 저주 같은 목숨 언제인가 마른 수숫단처럼 풀썩 무너지며 내 삶의 폐가에 쑥대 우거지던 바람 회오리쳐 아— 뒤돌아볼 수 없어 황망한 가슴 쓸어내리며 ​ 세상은 고통스러웠어 말하지 않겠어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 슬픈 노래 많은 날들이 흐르고 내가 어느덧 죽음의 나이에 들어도 묻어둔 채 묻어둔 채 다시 강물로 흐르고 싶지는 않아 비참해 ​ 술..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 차이콥스키 '만프레드' 교향곡 : 알렉산드르 루딘, 알렉산드르 라자레프 - 어떤 개인 날 : 황동규

어떤 개인 날 / 황동규​ ​ 未明에 ​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친구여, 찬물 속으로 부르는 기다림에 끌리며 어둠 속에 말없이 눈을 뜨며.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언 창가에 서서히 새이는 밤 훤한 미명, 외면한 얼굴 내 언제나 버려두는 자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어둠 속에 바라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처럼 이끌림은 무엇인가. 새이는 미명 얼은 창가에 외면한 얼굴 안에 외로움, 이는 하나의 물음, 침몰 속에 우는 배의 침몰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 ​ 저녁 무렵 ​ 누가 나의 집을 가까이한다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리 닫은 문에 눈 그친 저녁 햇빛과 문 밖에 긴 나무 하나 서 있을 뿐. 그리하여 내 가만히 문을 열면은 멀리 가는 친구의 등을 보게 되리. 그러면 ..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귀가 서럽다 : 이대흠

귀가 서럽다 / 이대흠 ​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 귀가 서럽네 - 『귀가 서럽다』(이대흠, 창비, 201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 Ⅰ. Allemanda Ⅱ. Double Ⅲ. Cor..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린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온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본다 문 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박남준, 창비, 2005)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바이올린협주곡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in D-Dur, Op. 61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Rondo - Allegr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1906-1975) 교향곡15번Symphonie Nr. 15 A-Dur, op. 141 I. All..

바흐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2번, 3번 : 기돈 크레머 - 강물이 아름다운 건 : 허형만​

강물이 아름다운 건 / 허형만 ​ 강물이 아름다운 건 아직도 내가 서러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 일월도 어느 햇살 여린 날 무심하게 무심하게 강가에 앉아 나의 그늘진 삶의 껍질 깨듯 살얼음 깨고 발 담그니 퍼져오는 그 순수함 ​ 강물이 아름다운 건 아직도 내가 먼 길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 -(허형만, 문학사상사, 200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무반주바이올린 파르티타1번Violin Partita no. 1 in B minor BWV 1002 Ⅰ. Allemanda Ⅱ. Double Ⅲ. Corrente Ⅳ. Double. Presto Ⅴ. Sarabande Ⅵ. Double Ⅶ. Tempo Di Borea Ⅷ. Double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 길 샤함,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시전집 『백석시전집(白石詩全集)』(창비, 1987) 로그인만 하면 그냥 볼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