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열사

바흐 무반주첼로모음곡 : 마르크 코페이 - “나를 찾아줘” : 김주열 열사(1944-1960)

들꽃 호아저씨 2022. 3. 15. 09:14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무반주첼로모음곡(Suites No.1-6 BWV 1007-1012) 제작시기1717~1723년 쾨텐

 

​Suites violoncelle JS Bach / 마르크 코페이Marc Coppey 첼로

첼로Violoncello, 1711년 베니스산 마테오 고프릴러Matteo Goffriller, Venise 1711

Les six suites pour violoncelle de JS Bach, interprétées par 

https://www.youtube.com/watch?v=4l5Ef8hMXEg

 

 

 

 

김주열 열사(1944-1960)

 

 

 

김주열 열사(1944-1960)

 

1960년 당시 17살이었던 김주열 열사는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으나 가정형편상 은행원이 되어 가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로 마산상고 진학을 결심한다. 당시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가 극한 상황에 달해 3.15부정 선거를 감행하였고 이에 3.15마산 민중의 민주화 의거가 폭발한다.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가 이틀 미루어지자 마산에 머물던 김주열 열사는 3.15마산의거 선봉에 서게 되고 진압을 하던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행방불명된다.

 

1960년 4월 11일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다. 시신의 오른쪽 눈에는 미국제 최루탄이 박힌 채 주검에는 퍼렇게 이끼가 낀 상태였다. 신문기자 허종이 찍은 김주열 열사의 처참한 주검 사진은 전국은 물론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고,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 1960년 3월 15일 마산 집회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곤봉을 든 경찰 ⓒ민주운동기념사업회(왼쪽) / 1960년 4월 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의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1960년 4월 12일 기사 부산일보(오른쪽)

 

▲ 1960년 3월 15일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열사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11일 마산 앞바다 중앙부두에 떠오른 모습

 

▲ 419 당시의 집회 현장 ⓒ419혁명기념도서관

 

 

 

 

 

 

3·15 의거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 준비 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한다. 이에 선거 준비 과정 중인 2월 28일, 대구에서는 학생들의 첫 시위(2·28 시위)가 발생하고, 당시 대구에서는 민주당 유세날에 학생들이 유세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등학생들을 일요일에도 등교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시민들과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 시위에 나선다. 경찰은 최루탄 및 총기로 무차별 발포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다 4월 11일,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의 2차 시위가 발발하게 되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인 시위는 부정선거 무효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문 발표 등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